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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庵) 김화식(金華植) 재조명> 논문의 저자 김영모 교수를 만나다.
“선생의 생가 터에 항일독립기념비라도 세워 후세의 교훈 삼아야”
2021년 05월 09일 (일) 19:18:27 조광석 ksym0517@hanmail.net
   
▲ 김영모 교수
올해 3.1절을 맞이 하면서 지역사회 항일독립운동 시발점의 인물로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보령의 항일독립운동가가 있어 주목받고 있다.
그는 바로 청소면 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庵) 김화식(金華植)선생이다.
특히, 청소면에 거주했던 김화식선생에 대해 연구와 논문을 통해 재조명하며 보령지역의 인물로 후세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항일독립운동가 복암(復庵) 김화식(金華植) 재조명> 논문의 저자 김영모 교수를 만나 논문 발표 뒷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Q: 어떻게 김화식을 알게 되었나?

A: 내가 김화식(1866-1943, 자, 仲一, 호, 復庵)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매년 보령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애향>지가 있다.
2019년 12월 어느 쯤 인가 집으로 이 잡지가 배달되었다.
그 잡지를 펴고 보니 보령의 ‘향맥’ 첫 논고가 바로 <소의신편을 편찬한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 선생>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아! 청소면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었다.
이 논고는 김화식 선생의 가계, 학문, 독립운동, 후손 소장가 문서 등에 관한 최초의 개별연구였다.
이 글을 통하여 김화식 선생에게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후손에게 훈장증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알게 되었다.

Q: 김화식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A: 2020년 5월의 어느 날 저녁에 보니 낯선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다음 날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청소면민이었다.
김화식 선생이 자신의 증조부인데 후손임이 입증되지 않아 증조부가 청소사람임을 입증할 자료 같은 것이 있을까 해서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증보신안지> 방리조를 설명해주고 <호서읍지>에 실린 옛 보령현지도를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찾아왔다.
그동안 김화식 선생이 자신의 증조부임을 입증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왔으나 여전히 입증되지 않아 애가 탄다는 얘기였다.
그가 내민 복사자료를 대충 훑어보니 대부분이 유인석(柳麟錫) 관련 자료였다.
이후 여러 자료를 검토해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사의 중요성에 비해 그의 학연, 재지에서의 활동, 그의 이명(異名) 김우동(金友東)에 대한 연구가 빠져있고 더욱이 국가보훈처의 김화식 선생에 대한 기록도 너무나 엉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의혹을 밝혀보려는 의도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Q: 김화식 후손에게 왜 훈장증이 수여되지 못하였나?

A: 한마디로 말하자면 등본의 이름 ‘김우동(金友東)’과 실제 이름 ‘김화식(金華植)’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등본에는 ‘김우동’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실명이 ‘김화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손, 보훈처, 독립운동연구가들이 바로 이 문제를 찾아 밝혔어야하는데 지난 25년 동안 이를 입증하지 못하여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Q: 그럼 어떻게 등본의 이름 김우동과 김화식이 동일 인물임을 입증하였나?

A: 김화식 선생 가계의 족보, 세거지, 묘산의 위치와 그의 문집 <복암집> 그리고 1914년 일제가 만든 호적등본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김화식 선생이 김우동으로 개명되는 전 과정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찾아 꿰맞췄다.
그러다보니 일반연구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김화식 선생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등본에 자신을 비롯한 가족의 이름을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올렸던 것이다.
등본의 ‘김우동(金友東)’은 현재의 ‘청소면 진죽리 죽하 677번지’에 거주한 김화식 선생 본인이었음을 이번 논문을 통하여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Q: 그동안의 연구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A: 왜 없었겠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김화식 선생이 유인석의 핵심참모로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다.
선행연구에서 밝히지 못한 부분들을 어떻게 고증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물론 김화식 관련 자료의 부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경기도 파주 세거의 김화식 선계가 보령 청라동에 입향하여 청소면으로 이거하였는지 그 뿌리와 이거과정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다.
조선사회는 사회적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였다.
이것은 청소면 거주의 김화식 선생이 어떻게 충북 제천의 유인석의 의병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였다.

Q: 보령지방 항일독립운동에서 김화식의 위상은 무엇인가?

A: 무엇보다도 김화식 선생 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유인석과 함께한 항일독립운동이다.
김화식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더불어 시작된 항일독립운동에서 유인석의 핵심참모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남포현에 거주하던 윤석봉(尹錫鳳)과 함께 보령지방의 항일독립운동의 물꼬를 텃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후 이어지는 홍주의병의 보령의 독립운동가들 예를 들면 유호근, 유준근, 백관형 등을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의 김광제 등은 바로 김화식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런 점에서 김화식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청소면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이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Q: 김화식 추숭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뒤늦게나마 지난 해 광복절에 후손에게 선생의 애국장과 훈장증이 돌아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그렇듯이 김화식 선생의 후손 또한 지난한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후손들에 대한 보훈은 국가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계속하여 기리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 동안의 선생의 행적을 찾아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선생의 생가 터에 항일독립기념비라도 세워 후세의 교훈으로 삼는 일 또한 우리들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김화식 선생의 이러한 추숭운동에 보령시민신문이 적극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리/ 조광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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