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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꺼내보는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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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문학보령예지회 신경숙 |
결실을 앞둔 시샘일까? 여러 가지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넘쳐나는 이즈음에 아버님 퇴원수속까지 도맡아야 하나 싶은 야속함과 피로감이 밀려드는데 차창 밖의 풍경은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하다.
추수를 끝낸 홀가분한 들녘에 따사로운 갈 볕이 잘 어우러져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과 동시에 「참새와 허수아비」란 노래가 떠올라 나직이 흥얼거려보는데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려 당혹스럽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거리며 닦아보지만 맘과는 달리 입에선 연신 슬픈 노래들이 꼬리를 물고 흘러나와 한껏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다지도 서러운 것인지 무엇이 그토록 지탱 못할 무게로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이만하면 편한 팔자라고 괜찮은 삶이라 자위하며 살아왔건만 실상은 아니었나보다. 불황 속 사업가의 아내, 수능을 이틀 앞둔 수험생의 엄마, 기숙사에 들어가 있지만 늘 맘 졸여야만 하는 고1 딸의 엄마, 막내아들과 결혼했으나 외며느리처럼 살아가는 나, 게다가 직장생활까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가슴이 탁 막혀왔다. 마치 방금 마취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온몸으로 삶의 무게와 고통에 맞닥뜨려 눈물범벅이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이 현재를 살고 있는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너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져 한참을 울고 나니 어느새 독기와 억척스러움은 눈물에 섞여 빠져나갔는지 순하디 순한 내가 룸미러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병원은 자기만의 독특한 향을 풍기며 사람을 맞는다. 그 역겨운 냄새를 음미하기도 전에 바삐 병실 문을 여니 퇴원시켜 달라고 내내 때를 쓰시던 아버님은 벌써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출입구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계셨다. 며칠 새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다. 세상을 호령하던 아버님께서 이제는 어린아이가 되어 보호자의 승낙 없인 입·퇴원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내 처분만 기다리고 계시는 거다.
“보호자 되시죠?” 간호사의 그 말에 눈물이 고였다. 퇴원수속을 밟느라 의사선생님과 면담이 이루어졌는데 신장기능이 악화될 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오길 참 잘했구나 싶었다.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라고 그 사이가 각별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한 치 걸러 두 치가 아니던가. 혈육들이 들었으면 다리 풀려 걸어 나가지 못했으리라.
본시 의사는 최악의 사태를 말해 최후의 책임을 피하려들고 환자가족들은 단어 하나에도 민감하여 심장이 오그라들건만 서로의 입장 차이인 걸 어찌하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노환이라 딱히 치료방법이 없다는 병원 측의 말과 하나도 아픈 데 없다며 신이 난 아버님의 말씀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데 집으로 가는 길은 경쾌하다. 급한 듯 앞질러 대문을 들어서시며 엄마 찾듯 아내를 부른다. “여보, 나 왔어.” 구부정한 모습으로 아버님을 맞이하는 어머님의 모습에서 먼 길 달려오며 보았던 농익은 가을풍경이 묻어났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가슴 찡했던 잠시잠깐의 침묵. 평생 짝꿍 되어 두 손 맞잡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넘어 존경스러웠다. 상수리나무 마지막 잎사귀를 떨어뜨리기 직전 색깔과 흡사한 스웨터를 입고 계시는 어머님께서 끓여놓으신 따끈한 미역국에 밥 한 그릇 말아먹고 돌아 나오는데 두 분은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계신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별의 시간 속에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살아가면서 이토록 애잔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두 분의 배웅을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받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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