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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 이야기

2016년 09월 08일 (목) 15:36:53

편집부

9319951@hanmail.net


▲ 여성문학보령예지회 -서태숙-

계절의 끝자락에 찾은 수목원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 여름이 다 지나갈 동안 소나기 한번 시원스레 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유달리 긴 무더위 속에 청량감을 자아내 듯 완만한 해안을 끼고 있는 수목원은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워낙 식물을 좋아하는지라 수목원 탐방은 나의 기호에 딱 들어맞았다. 크기로 치자면 광릉수목원에 비견할 수 없지만 수목원이 생긴 역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 유래만큼은 단연 으뜸이지 않나 싶다.
원추형의 낭새 섬을 마주보며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수목원에 들어서면서, 나는 생의 찰나의 눈부신 추억을 마음에 담아 갈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눈부신 감동을 맞이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될까?
늘 반복적인 일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그럼에도 때로 벅찬 감동을 받게 되는 순간, 문득 생이 아름답게 각인되어 내면의 다소 침체된 기운을 떨쳐버리는 기폭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민병갈 (Carl Ferris Millr) 님은1945년 9월8일에 인천 월미도에 상륙해, 조선 총독부 통신시설 장악을 위한 일본어 통역 장교로 이 땅에 파견됐다.
벽안의 푸른 눈으로 이 땅을 세밀하게 살피고 사랑했던 그가 죽어서 개구리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평소에는 굼뜨고 느릿한 개구리지만 위기를 만나면 민첩하고 재빠른 것이 한국인의 기질과 이미지가 닮았다는 것이다. 평생 조선을 사랑하고 이 나라의 음식, 문화 의복까지도 그처럼 사랑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한복을 입고 환하게 미소 짓는 스크린 속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숭고한 그의 정신에 온몸에 전율이 인다.
이 땅에 자라는 식물들 중 그가 가장 사랑했던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또 다른 말로 ‘묘아자나무’ 라고도 한다. 해변 가 낮은 산의 양지에서 자란다. 높이 2~3ㅡm이고 가지가 무성하며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고 두꺼우며 윤기가 있고 타원 상 육각형이며 각점이 예리한 가시로 되어있다. 꽃은 4~5월에 핀다. 가시가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 해서 호랑가시나무라고 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가시는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뜻하고, 붉디붉은 열매는 보혈을 상징하며 하얀 꽃은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한다. 특히 완도에서 자생하던 호랑가시나무를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보고 있다.
이 꽃나무는 생활소품이나 접시, 다기 등 아름다운 문양으로 도금되어 천리포 수목원의 상징물이 되었다.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받기까지 이 호랑가시나무의 역할도 일조를 했지 않나 싶다. 우리가 눈여겨 살피보지 못한 보배의 가치를 극대화 시킨 그는 역시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이 당면한 고통이 혼란스럽지만 성장의 시대를 직접적으로 관통하며 민병갈님이 기록한 사진들을 보았다. 비참함과 혼란스러움보다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오밀조밀하고 조화로운 한국의 자연경관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한옥과 한복 패션, 각종 둘레 길의 유행 열풍이 민병갈님이 그토록 추구했던 이념과 같은 걸보니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문화적 감각과 수준을 가늠케 한다.
40년 동안 일궈놓은 수목원에 안장되어 늘 바다를 굽어보고 있을 그의 숨결이 느껴져 수목원에 발을 내딛는 걸음마저 조심스럽다.
수목원 곳곳에 서려 있는 그의 따스한 온기가 잠시나마 세상의 시름을 잊게 만든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작은 정원에 배롱나무 꽃들이 그득히 피어있을 무렵, 고풍스럽게 지어진 한옥에서 파도소리 들으며 하룻밤 지내고 싶은 바램을 가져본다
이제 더없이 푸르러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곳에서 새롭게 충전된 긴 여운으로 앞으로 남은 생을 활기차게 살아가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