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경 숙 보령예지회

봄기운이 완연한 날 얼굴에 칙칙한 가을빛을 드리우고 친구가 왔다. 한눈에 봐도 지친 기운이 역력한데 속내를 들여다보니 해결되지 않은 똑같은 고민으로 아직도 속앓이 중이다.

누가 봐도 답은 뻔한데? 정작 본인은 이런저런 염려로 선뜻 헤어 나오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닮음 꼴의 나를 본다.
그간에 애정을 갖고 내 고민에 동참한 이들이 정작 이렇다 할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미적거리는 모습을 장시간 지켜보며 참 많이 답답하고 지치기도 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도 수없이 고민을 풀어놓으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러 형태의 조언을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긴 세월을 몸담고 있던 둥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빠져나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큰 숙제를 앞에 두고 친구와 나는 남아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그 타당성을 이해받고 싶기에 결단에 앞서 수없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농사일이 얼마나 전문적이고 힘든 노동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힘들 때마다 “다 접고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지어야겠다.” 라든지, 중병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핏하면 내뱉는 “나 우울증인가 봐”라고 말하는 것처럼 요즘은 장애란 말을 서슴지 않게 쓰고 듣는 사람 또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추세다.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다는 공황장애를 비롯하여 우울장애, 불안장애, 선택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적응장애 등등 다양한 장애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며 친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개개인의 약점을 보호해주는 역할까지 해주는 것 같아 한편 다행스럽기도 하다.
여러 가지 장애 중 굳이 내게 연관되는 장애가 있다면 선택 장애라 할 수 있겠다.

삶 자체가 어찌 보면 선택의 연속인데 중대한 선택은 말할 것도 없고 자질구레한 선택의 기로에서도 늘 장벽에 가로 막힌 듯 유난히 맥을 못 추는 모습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결정에 앞서 겁을 내는 건 그 내면에 손해 보고 싶지 않은 욕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까짓, 배포 좋게 한번 부딪쳐 보고 아니면 말지, 좀 손해 보면 어때? 어차피 성공과 실패할 확률은 50대 50인데. 그리 생각하니 결정에 앞서 신중은 기하되 스트레스는 많이 해소되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차피 박완서님의 글처럼 우리 모두는 못가 본 길이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게 당연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아감에 있어 이렇다 할 정답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후회 따윈 하지 않는 삶을 살면 그뿐. 오랜만에 만나 긴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앵무새처럼 만날 때마다 친구는 오늘처럼 같은 고민을 말했고 난 똑같은 답을 열심히 말했다. 그러다가 오늘도 역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언제나 내게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는 친구에게 더는 몸을 혹사시키면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정신건강에 더없이 좋을 봉사도 좋지만 이젠 가족들의 원성에 귀를 기울이고 몸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고…….
건강이 안 좋아 이제 힘에 부치니 보약까지 지어 먹으며 봉사하느라 볼 때마다 얼굴이 때꾼한 귀한 내 친구. 걱정이 넘쳐 밥 한 끼 해먹이며 이런저런 당부의 말을 건네는데 문득 네코가 석자인데 남의 코 닦아주려 달겨드는 모습이 가관이라던 지인의 핀잔이 떠올라 호탕하게 웃었더니 친구도 따라 웃어 웃음바다가 되었다. 착한 친구가 설거지까지 해주고 가서 깨끗이 치워진 식탁에 고요히 앉아 생각에 잠긴 나는 오랫동안 고심했던 일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결정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찻잔을 들고 책장 앞을 서성이는데 한권의 책 제목이 가슴에 쐐기를 박는다. `실행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