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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보령문화 산책 1
성주사지에 새겨진 동물들
2019년 03월 07일 (목) 10:40:23 편집부 9319951@hanmail.net
   
▲ 39년간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사 현재 웅천중고 교장 보령시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 사료조사위원
○ 1,400년 역사 성주사지

보령 최고 유적지 성주사지는 대천시내에서 동쪽,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7km 남짓 떨어져 있다.

부여로 향하는 국도 40번 따라 성주산 터널 지나면 곧바로 성주 삼거리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한 500m 쯤 올라가다보면 성주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위 학교 담장 넘어 넓은 벌판이 펼쳐지는데, 바로 그곳이 국가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다.

성주사지는 한 때 안에 큰 마을이 들어서 있었지만 국가사적지로 지정되면서 건물들이 모두 밖으로 소개되고 지금은 빈 들판으로 남겨져 있다.

바람이 지나는 훤한 사적지에는 저 백제, 신라, 고려시대 번성했었던 절집의 주춧돌과 유물 몇 점이 그 옛날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 성주사지와 주변 전경을 천천히 보고 있노라면 오늘을 사는 탁한 영혼이 절로 맑아지기도 한다.

절집을 둘러싸고 있는 옥마산, 성주산, 만수산의 산봉우리는 고개를 들어볼 정도로 높고, 편백, 솔, 참나무, 단풍 등이 다양하게 어우러진 검은 숲은 울창하다. 숲길 사이 난 길은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부터 소리 내며 흘러오는 성주천 물은 청정하기 그지없고, 냇바닥의 희거나 검은 돌들은 잔잔하여 정겹기까지 하다.

처음 여기 절이 세워지게 된 것은 백제 법왕 때(600)로 처음 이름은 오합사 (烏合寺 혹은 烏含寺)라 칭하였다고 한다.

나라 위해 산화된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세워진 국가 최고 원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자 오합사는 그 위상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통일 신라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식읍으로 지정되었고, 이 절도 그와 그 후손들의 영향 하에 들어가 개인 원찰로만 명맥이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9세기 들어 김인문의 7대 손 무염이 당나라에서 오랫동안 정진 수행하여 선종을 깨우쳐 귀국하여 여기에 머물면서 절의 위상이 달라졌다. 무염은 같은 김인문 후손인 당시 신라 최고 권력자 재상 김양 등의 후원을 받아 성주사를 크게 중창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왕실에서도 무염을 국사로 모시고 자주 궁궐로 부르게 되었고, 성주사는 2,000여 문도들이 찾아와 공부하는 신라 최고 선종 일파인 성주산문을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무염이 죽자 나라에서는 그를 기리는 ‘낭혜(朗慧)’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부도 탑과 최치원이 찬하고 최인연이 쓴 탑비(大朗慧和尙白月寶光塔碑, 국보8호)를 세웠다.

성주산문에서 수련한 당대 최고 인재들은 고려와 후백제의 창업에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들은 국가 설계와 지배 이념 구축에 나섰고 불교 국가 고려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여기 절은 오합사, 성주사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백제, 신라, 고려의 주요 인재를 배출하여 왔고, 각 나라의 중심 세력들은 여기를 큰 기반으로 삼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로 왔던 절이 어느 날 왜 갑자기 폐사지로 변모하고 말았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절의 내력을 생각하노라면 허망한 역사와 무상한 인간사가 생각되어 숙연해지기도 하다.

○ 산수문전 닮은 성주사지!

유홍준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6」 ‘인생도처유상수’ 편에 여기 사적지와 주변 경관을 보고 ‘성주사터 오면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다.’라고 말하였다.

절터와 주변 경관을 보는 것이 마치 백제인의 문물을 본 듯하다고 표한 것이다.

넉넉하면서도 편안하여 정겹고, 자연 그대로여서 억지가 없으니 순화롭기 그지없고, 섬세하면서도 단아하여 볼수록 매력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다산 정약용도 여기를 다녀가고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1795년 천주교 전파와 관련하여 중앙 높은 동부승지에서 지방 낮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이곳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가 머문 금정역은 청양 화성면에 있기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백제 옛 도읍지 부여와 여기 성주사지를 둘러보았던 모양이다.

둘러본 소감을 시로 지어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히 전해주고 있는데 ‘부여회고(夫餘懷古)’라는 칠언율시다.

내용은 ‘강기슭을 가로막는 철옹성만 보았기에(惟看鐵甕橫江岸) 많은 전선들이 바다 건너옴 안 믿었네(不信雲帆度海波) 술잔 잡아 계백 장군께 제사 드리고픈데(欲把殘杯?階伯) 안개에 가린 낡은 사당 등나무만 얽혔네(荒祠煙雨暗藤蘿)’하고 있다.

시는 계속하여 여기 성주사지에 온 감상도 담아내고 있다.

‘오함이란 절 옛날 왕조 절간으로 끝이나 석양 바람 향해 나그네의 말이 슬피우네.’( 烏含已作前朝寺 客馬悲鳴向晩風)라고 하여 백제의 장수들이 전쟁에서 패하자 주인 잃은 말들이 북악(北嶽/성주산 혹은 오서산)에 있는 오함사(烏含寺)라는 절에 들어가 며칠 동안 울면서 절간 둘레를 돌다가 지쳐서 죽었다는 전설을 살려 내고 있다.

망해버린 나라의 옛 절터에 와서 느끼는 애처로운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1,000년 절을 지킨 코끼리, 사자 그리고 용!

성주사지는 국가에서 1968, 1974년 두 차례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뒤로도 지자체와 문화재청에서 몇 차례 더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절의 내력과 유물들의 특징이 밝혀져 가고 있다.

사적지 안에 들어서면 석등, 중앙 5층탑, 석계단과 사자상, 불대좌, 3층탑 3기,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부도탑 일부, 김입지비 파편, 석불입상 등의 석조 유물과 금당지, 3천불전지, 회랑 등의 건물지가 보인다.

석조 유물을 들여다보면 이런 저런 문양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는 몇 가지 동물들을 표시한 것이 보인다.

그 표기한 문양을 살펴서 절집 지은 이들의 바램을 헤아려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것은 석등, 불대좌, 탑비에 발견되는 안상(眼象)으로 표시되는 코끼리, 금당에 오르는 석계단 난간에 새겨진 산예(?猊)로 표시되는 사자,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귀부에 새겨진 비희(??)로 표시되는 거북 닮은 용, 같은 탑비의 이수에 새겨진 이문(?吻)으로 표시되는 교룡 등이다.

거기다 성주사 전신인 오합사(烏合寺 또는 烏含寺, 烏會寺)로 표기되는 오(烏) 즉 까마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공히 전하는 ‘말(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여기 저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로 여기 오합사에 ‘흰 말 혹은 붉은 말’이 절 주위를 며칠이고 돌다가는 끝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코끼리의 눈 혹은 귀를 포함한 얼굴 모습을 형상화한 안상(眼象)은 석등, 불대좌,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 각각 4개 이상씩 다양한 크기와 여러 모양으로 표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불가에 많이 나타나는 코끼리(코끼리 꿈을 꾸고 마야부인은 석가모니를 낳음, 석가모니부처를 자비로 보좌하고 협시하는 보현보살은 늘 코끼리를 타고 다녔다고 함 등)는 불교의 최고 덕목인 자비를 상징한다고 한다. 안상을 보고 자비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뜻이리라.

불대좌에 오르기 전 석계단에 새겨진 산예(?猊)라는 사자상(獅子象)을 볼 수 있다.

1980년대 원래의 것이 도난당하여 지금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울창한 원시림에서 웬만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강건하고,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사자처럼 지혜로울 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대선사가 진리 법문을 듣고자 찾아온 중생들에게 설법할 때 오르는 단을 사자좌, 그 설한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지 않는가? 사자상은 이러한 불가의 진리, 지혜 등을 상징하는 것이니 의미 있게 바라볼 일이다.

국보 8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寶光塔碑)의 아래 부분은 귀부(龜趺)라 하여 거북 모양이다.

거북 모양의 비희(??)는 뿔 달린 머리를 바로 들고 째진 두 눈은 앞을 응시하고 있으며 네발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헤엄치고 있다. 머리와 턱 앞 그리고 네 발과 등껍질 아래에도 물 소용돌이가 일렁이고 있다.

저 크고 무거운 비신과 머릿돌 이수를 떡 받치고서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아주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비희(??)의 이런 모습은 든든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다.

비희는 용의 아홉 아들 중 첫째로 태어나 책임감이 아주 크고 모든 착함을 받들어 행한다고 한다.

여기 비희도 일천년 넘게 변함없이 공덕 수행 내지 정진 중인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크고 무거운 빗돌에 새겨진 대낭혜화상을 떠받치고 해탈의 바다를 헤엄쳐 극락정토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희는 이렇게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강한 책임감, 지극한 공덕 수행, 쉼 없는 정진을 일깨워주고 있다.

비신 위에는 머릿돌 이수(?首)로 표시되는 이문(?吻)을 볼 수 있다.

비의 제액을 감싸 안으며 구름 위를 나르는 이문은 생동감있게 묘사되어 있다.

본래 이문은 교룡으로 용의 아홉 아들 중 둘째로 알려져 있고 때때로 치미(雉尾)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건물의 지붕 혹은 비석의 꼭대기 등 높은 곳에 올라가 먼 곳을 응시하기를 즐겨하고 재앙 특히 화마를 제압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문을 바라보노라면 소망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정진하는 모습과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재앙 예방 즉 자정의 노력이 소중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 까마귀는 천손(天孫) 백제인 상징!

다음은 성주사 이전 오합사라 불린 절 이름과 관련하여 오(烏) 즉 까마귀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곳 성주사지 주변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지는 않는다.

까마귀 서식과 관련하여 오함사 혹은 오합사라 칭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백제가 오랫동안 태양 숭배 전통이 까마귀 문양 표기 내지 까마귀 지명 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백제를 건국한 부여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삼족오(三足烏)’ 등으로 상징되는 태양 숭배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 산은 성주산이라 부르기 전에는 오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백제시절 여기 오산을 북악으로 칭하여 5방위 중 북쪽 중심으로 여기기도 하지 않았는가? 또한 오서산도 그러한 의미에서 단순 까마귀 서식하는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인이 진정 천손(天孫)임을 입증하는 말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또한 바다 건너 왜는 오랫동안 백제와 역사적 인연을 맺어왔고 백제의 선진 문물 수용하였던 터라, 일찍부터 태양 신성 풍조가 퍼진 것이 이러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일본축구국가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진 까마귀 엘블림이 이와 전혀 무관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햇빛이 유난히 많이 내리쬐는 절터에 서니, 저 백제 시절 절 이름을 ‘오합사’라 짓고 그들 스스로 천손임을 자랑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백제 장수 타던 말, 주인 잃고 홀로 절 돌아

말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 15년(656)에 ‘여름 5월에 붉은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 울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당을 돌다가 죽었다.’라고 적어 백제 앞날에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 권1 기이제일(紀異第一) 태종춘추공 편에는 ‘현경 4년 기미년(659) 백제 오회사(烏會寺)에 몸집이 큰 붉은색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12시간 동안 절돌이(?寺)를 하였다.’고 하여 기이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오합사는 백제 순국충신과 호국영령을 달래주던 원찰이었다.

나라를 지키려 용맹하게 싸웠던 백제 장수는 전장의 이슬로 산화되고 그가 타던 말만 돌아온 것이다.

홀로 남겨진 채로 주인 원혼을 달래려 절을 도는 애처로운 정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붉은 말은 이제 자기 주인이 그토록 지켜려 했던 나라가 끝내 기울어져가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는지? 그 말이 돌던 절집을 돌아 걸으면서 그 옛날을 회상해 본다.

절집을 돌아보면서 코끼리, 사자, 비희, 이문이 새겨진 문양을 찾아보고, 까마귀, 말의 설화를 되새겨 본다면 이 절의 역사와 성주사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끝)

주 1회 신재완 문화산책 코너에 보령의 자연과 문화현상에 대한 글을 쓸 예정 다음 2회차에는 <외연도에 3~5월 한창인 보령시화 동백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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