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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보령문화산책 3
잔미산 옥미봉 봉수대
2019년 04월 26일 (금) 10:12:41 편집부 9319951@hanmail.net
1. 충청 최고봉 봉수대

21번국도 따라 남포에서 웅천으로 넘어 가려면 두 지역의 경계되는 곳에 이어니 재(梨峴)를 지나야만 한다.

그 고개 마루에 서면 동쪽으로 잔미산이 우뚝하다.

산 아래 안내표지판에는 산꼭대기 옥미봉 봉수대가 있음을 알리고, 거기에 오르는 길 방향과 정상 봉수대까지의 직선거리(1.3km)를 보여준다.

또 표지 옆에는 주변 산과 등산로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기도 하다. 봉수대 찾는 사람들은 보통 그림 지도와 산꼭대기를 번갈아 보다가는 숨 한번 크게 내 쉬고서 곧장 숲으로 난 산길로 발을 옮긴다.

산길 따라 몇 발자국 떼면 곧바로 깊은 숲에 들어설 수 있는데, 숲속 정경은 직전 차가 연락부절 다니는 고개 마루와는 사뭇 다르다.

어른 양팔 벌려야만 겨우 안을 수 있는 큰 소나무들이 하늘 덮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고 빼곡하다.

잔돌조차 없는 황토 바닥은 싸리나무와 조릿대가 잔잔하다.

숲속으로 들어오니 한낮인데도 컴컴하고 작은 소리 하나 없어 스산한 기분마저 들기도 하다. 정상으로 가는 오르막은 숲 안을 가로 질러 한 사람 지날 정도로 좁고 가파르다.

때로는 네발로 기다시피 올라가기도 해야 한다. 금방 땀이 솟고 숨이 차오른다.

그러기를 한 10여 분 헐떡거리며 오르면 홀연 사방이 훤하고 바람도 시원한 산등성이에 올라설 수 있다.

산 능선 따라 내내 같은 방향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가면 정상이 바로 보인다. 봉수대 있는 꼭대기는 출발 때보다 조금 더 다가와 있지만 여전히 까마득하다.

왼쪽엔 봉화산 밑 사현 마을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또 오른쪽엔 잔미산 기슭 아스라이 펼쳐진 파라다이스 공장과 두룡 윗잔뫼 부락이 눈에 들어온다.
잔미산 정상과 양쪽 산마을을 번갈아 보면서 능선 따라 걷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또 10여 분 걸어 나가면 양쪽 마을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처음 산에 들 때보다 더 가파른 길과 맞닥뜨리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경사 완만한 사현(沙峴)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었는데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몇 년 사이에 옛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20여 년 전 사현으로 넘는 옛길로 봉수대 오르던 기억을 더듬고, 산을 보면서 눈짐작을 하여보지만 도대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오른쪽 봉화산 가기 전 낮은 곳이 웅천 수부리로 통하는 사현 고개이고, 거기서 왼쪽으로 틀어 산 능선 따라 남쪽 잔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그 옛날 봉수군들이 저기 옥미봉 봉수대를 오르내리던 길)이었는데, 어느 새 왕래하는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숲이 우거지자 그만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

끊어진 옛길 위엔 이제 바람만이 지날 수 있다. 옛길에 미련을 두고 찾아 나서도 별무 소용없다.
오른쪽 직선으로 새로 난 등산로에 발길을 옮겨보는데 경사가 여간 급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나무뿌리와 돌무더기가 얽히고 설켜 험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 등산로 가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뿌리 내리고 선 참나무들이 나란하다.
그 나무들은 듬직하게도 굵은 동아줄을 길게 이어 맬 수 있도록 모두 허리를 내주고 있다.
밧줄 도움이 있으니 가파르고 험한 등산로를 오르내릴 수 있다.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시당국에서 길을 내면서 매어 놓았다고 한다. 밧줄 잡고 힘들여서 한 7~8분 오르면 봉수대로 가는 능선 길에 올라설 수 있다.
그 옛날 봉수대 오르내릴 때부터 있었던 옛길인 것이다. 거기에도 화살표 새긴 표지판이 있는데, 잔미산 정상으로 향하는 화살표와 0.3km라는 적은 글씨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능선 따라 100여 m 오르니 동쪽은 수부리 마을이 보일 듯 말 듯하고 서쪽은 아주 훤하다.
가까이 남포 간척지와 대천시가지 그리고 멀리 서해바다가 다 보인다.
거기서 다시 힘들여 100여 m 더 오르면 능선 길은 끝나고 축구장 서너 배 크기에 약간 동고서저로 기울어진 평평한 벌판이다.
벌판엔 제법 반듯반듯한 나무들이 건강하고, 동쪽으로 벌판 끝나는 곳이 바로 정상이다. 저 아래 이어니 재에서 출발하여 여기 산꼭대기 416.8m에 도착하기 까지 1시간 남짓 걸렸다.
사방이 시원하게 훤하다.
바로 거기엔 현대 최첨단 웨이브통신망 중계탑이 우뚝하고 산불감시 카메라도 함께 설치되어 있다.

옛 것을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최첨단 통신 장비도 함께 있는 것이 의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현대 첨단 통신인 마이크로웨이브 무선통신이야말로 저 옛날 봉수와 마찬가지로 가시거리 통신임을 깨닫고는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옛날의 봉수대 터에 오늘날 마이크로웨이브 무선통신 중계탑이 들어서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둘은 입지 조건이 같기에 당연히 겹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산불감시 카메라도 사방으로 시야가 확보되는 봉수대 터에 설치해야 효과 만점이었을 것이다. 통신 중계소 남쪽 바로 앞에는 둥근 돌무더기가 보인다.
돌들은 모두 거무스름하면서 크지 않은 작은 돌로 쌓여있다.
높이 3m, 둘레 지름 2m 쯤 되어 보인다. 바로 여기가 충청도 봉수대 중 가장 높은 고도에 설치된 옥미봉(玉眉烽) 봉수대다.

2. 조선후기에 설치된 옥미봉 봉수대

옥미봉 봉수대지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래 표의 것을 요약한 것이다.
옥미봉 봉수대에 대한 설명은 2004년 보령지역 봉수대와 관련하여 보령문화연구회 회원인 황의호, 신재완, 황의천이 공동으로 자료 조사하여 발간한 『보령의 봉수대』 책자에 실린 것이다.

옥미봉 봉수대
• 남포면 사현리, 웅천읍 두룡리, 수부리 접경 잔미산 정상(416.8m) 삼각점에 위치
• 21호 국도 이어니 재 남쪽 오석공방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 능선 타고 오름
• 비인 칠지산 봉수대에서 받아 주교면 조침산 봉수대에 전함
• 칠지산과 조침산과의 직선거리는 도상거리로 모두 14km
• 산 정상 능선 따라 남북방향 봉수대, 5개의 봉대 흔적
• 가장 남쪽 봉대가 제일 크고 뚜렷(직경 11m 정도 원형 축대, 가운데 봉돈)
• 기초가 되는 축대만 원형, 남쪽의 봉돈 위 북쪽으로 4개의 봉돈 흔적이 보임
• 모두 직경 2m 정도, 1~2m 간격, 축대 없이 산 능선 위 원형의 1줄의 돌무더기
• 남쪽 축대 남쪽 4m 지점까지 호, 호 밖에는 담의 흔적, 문지(門址/폭 1.8m)도 보임
• 문지 동쪽 폭 1.2m, 길이 4.0m 돌담 흔적, 축대 동쪽, 서쪽 급경사지 삭토 / 방어 용이
• 남쪽 104m 지점 평탄지에 24m×17m의 타원형 돌담(폭 1.5m, 높이 1.3m) 흔적
• 돌담 동쪽에는 평탄지가 있고 주변은 온통 신하대로 덮여 있음 (연료 저장 추정)
• 동쪽의 평탄지는 건물지, 신하대는 건물지 주변에 방풍림으로 심었던 것으로 보임
• 현재 원통형 굴뚝모양 봉수대는 국적 불명으로 2000년 보령시에서 잘못 복원한 것임
/ 「保寧의 烽燧臺 」(2004년 간, 보령문화연구회 편집, 대천문화원 발간) p19

옥미봉에 서니 사방으로 막힘이 없이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남쪽은 웅천읍내와 주산면 그리고 멀리 비인 칠지산(漆枝山)이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그 옛날 조운선이 지나던 바닷길과 섬들이 올망졸망한 서해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남포읍내와 대천시가지는 물론 남포 간사지, 등경산(登冏山), 대천 간사지, 조침산(助侵山/지금은 봉화산이라 칭함)이 바로 보인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까이 남포 봉화산, 옥마산이 나란하고, 멀리 오서산이 희미하다.
동쪽은 우리티 고개, 수부리, 동막산, 양각산, 웅천천, 성동리, 운봉산이 차례로 둘러서 있고, 대창리, 주렴산, 됨방산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 옥미봉에 봉수대가 처음 설치되고 관방시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전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7세기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옥미봉이라는 봉수대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다가 18세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이르러서야 처음 확인할 수 있기에 그렇게 짐작해 본다.

옥미봉 봉수대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총 5개 봉수망(1903년 대한제국 칙명으로 간행된 『增補文獻備考』에 나타난 것을 참조하면, 제1거 慶興→漢城, 제2거 東萊→漢城, 제3거 慶興→漢城, 제3거 江界→(內陸)→漢城, 제4거 義州→(海岸)→漢城, 제5거 順天→漢城의 선로를 들 수 있다.)중 순천 돌산도(順天 突山島)에서 한성 목멱산(漢城 木覓山)으로 향하는 제5거(第五炬)의 선로 중 간봉에 해당된다.

순천에서 시작된 제5거는 옥구 화산(沃溝 花山)에서 직봉(直烽)은 내륙으로 가고 간봉(間烽)이 충청 서해로 갈라져 오는데, 간봉으로 온 봉수가 먼저 서천 운은산(舒川 雲銀山)을 거치고, 다음 비인 칠지산(庇仁 漆枝山)에서 와서 바로 여기 남포 옥미봉(藍浦 玉眉峰)에 전해준다.
여기 옥미봉 봉수는 보령 조침산(保寧 助侵山), 홍주 흥양곶(洪州 興陽串), 결성 고산(結城 高山), 홍주 고구산(洪州 古丘山), 서산 도비산(瑞山 島飛山), 태안 백화산(泰安 白華山), 태안 주산(泰安 主山), 해미 안국산(海美 安國山), 당진 고산(唐津 高山), 면천 창태곶(沔川 倉宅串)으로 서해안을 두루 전하다가 양성 괴태곶(陽城 塊笞串/현재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원정7리 봉화재, 고도 83m)에서 다시 직봉과 합류한다.

제5로 봉수의 순천 돌산도는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은 조기경보체제인 봉수에 대한 관심과 왜적 침입 대비에 봉수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난중일기를 읽어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이 발발하기 2달 전 2월 한 달 일기에 무려 세 번씩이나 봉수대를 확인 점검하는 대목이 나온다.
1592년 임진년 2월 4일(북봉 종고산 봉수대 점검), 2월 19일(백야곶 방비 검열), 2월 27일(북봉 지형 살펴봄)에 점검 사실과 조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수 사람들에게 오늘날까지 종고산 봉수와 관련하여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데, 장군이 왜란 중에 처음 출정하여 싸워 이긴 옥포해전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종고산 봉수 활용에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3. 이전 여도점 봉수는 왜구 침입 조기 경보

18세기 이후 남포 옥미봉 봉수대는 비인 칠지산 봉수대에서 봉수를 받아 보령 조침산 봉수대로 전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통달산(웅천읍 소황리 소재로 웅천천 하구로 해안 인접) 봉수대, 덕산(웅천읍 죽청리 소재로 해안 인접) 봉수대, 여도점(남포면 소송리 등경산 소재로 해안 인접) 봉수대가 옥미봉 봉수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여 왔었다. 통달산, 덕산, 여도점은 여기 옥미봉에 비해 조운선 등이 지나는 바다에 훨씬 더 가까이 위치하기에 왜구 출몰 등 외적 침입의 사실을 보다 신속하고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었고, 왜구의 내륙 침입 경로인 웅천천 하구 경계에도 적절하였을 것이다.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웅천천 하구와 남포 보령 앞바다에는 그 어느 곳보다 왜구 출몰이 잦았다. 국가에서는 바로 여기에 군사적 경계와 조기경보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고 군사적 관방체계상 웅천천 하구와 남포 보령 앞바다에 집중적으로 봉수대(통달산, 덕산, 여도점)를 설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왜구 출몰은 줄어들고 신속한 봉수 전달이 새롭게 필요하게 되자 종전 해안가 봉수대(통달산, 덕산, 여도점 봉수대)를 폐하고 좀 더 내륙으로 들어온 보다 빠른 전달의 봉수 선로인 옥미봉 봉수대를 신축하였던 것이다. 경계의 연변봉수로서의 역할보다는 신속한 전달의 내지봉수로서의 역할이 강화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서해 앞바다에 이양선 출몰하는 것은 충청수영에서 관할하는 권설봉수에 그 경계와 정보 전달 역할을 맡기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시기 근거 선로 비고 15C 세종실록지리지 칠지산 → 덕산 → 여도점 → 조침산 잦은 왜구 출몰로 조운선 과 웅천천 하구 경계 절실 16C 신증동국여지승람 칠지산 → 통달산 → 여도점 → 조침산 덕산 봉수대 폐지 18C 여지도서 칠지산 → 옥미봉 → 조침산 신속한 봉수 전달 필요, 여도점 봉수대 폐지 <조선시대 보령지역 봉수대의 이설과 변천 / 2004년 보령의 봉수대 참조> 4. 전국 네트워킹한 봉수망

봉수(烽燧)란 횃불과 연기로써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통신제도의 하나이다.
대체로 수십 리의 간격으로 후망(候望)이 좋은 산봉우리에 연대(煙臺 또는 烽燧臺)를 설치하여 적의 침입 등의 움직임을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晝煙夜火) 중앙(兵曹, 漢陽)과 지방(守令, 鎭堡)에 전달하였다.
단순 봉화(烽火)와 다른 것은 개인적 의사소통이 아니라 공공의 군사적 통신이 주목적이며 전국 네트워킹으로 모든 정보가 중앙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중앙집권적인 체제 유지 및 국가안보의 중요한 동맥이었고 시설의 축조, 유지, 인력 동원 등 조직과 관리는 엄정하게 하여 경계에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봉수제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전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은 없으나, 아마도 인류가 불을 사용하면서 상호 신호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인 이론인 것 같다.
그것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스위치 봉수(불을 피워 담요 등으로 ‘덮었다 떼었다’를 반복하여 신호함), 그리스의 암어화 봉화(사전 약속에 따라 서로 다른 불꽃 이용 전달), 중국 북경원인의 주구점(周口店)에 그을림 신호, 일본 옛 산성 유적에 봉가(烽家) 표시 토기 발굴로 봉화 흔적 등 그 유례는 모든 인류 종족이나 민족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봉수는 중국의 봉수제도를 본받은 것이 많다. 중국에서 봉수 관련한 것은 시대에 따라 늘 찾아볼 수 있다.
서주 유왕 애첩 포사(褒姒)와 관련한 봉화 이야기(그녀의 웃음 보려 거짓 봉화까지 올리다 기어이 나라 망함),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들이 봉화 올리면서 각축을 벌인 일, 진나라 때 만리장성 성벽 따라 설치된 봉화, 한나라 봉화 통신, 당나라 때 돌궐 방어 목적의 병부봉식(兵部烽式) 봉수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봉수의 유래를 찾아보려면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기에 기록에 의한 것만 찾아본다. 가야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이할 때 올린 봉화, 백제 온조왕이 말갈족과 싸운 봉현 전투, 고구려 시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자명고(산악국가인 낙랑의 조기경보체제로 봉수를 자명고라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됨),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사용한 수많은 봉수, 고려 인종 원년(1123) 송나라 사신 일행을 흑산도에서 개경까지 인도했던 봉화, 고려 의종 3년(1149)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상수에 의한 봉수제도 설정,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송악산에 봉수소 설치, 고려말 왜구의 잦은 출현으로 거화방식 변화 및 신속 전달 요구 등이다.

5. 디지털 통신 원조 세종 봉수

조선은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계승해 갔다.
특히 세종 때에 이르러 여진족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하고, 3면 해안 및 제주해안으로 침입해 오는 왜구들을 격퇴하기 위해 전국 해안가 중심으로 산성 및 읍성을 축조하였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기경보체제를 갖추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외적의 침입을 상시적이고 효율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지형에 맞는 봉수제도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봉화 거수의 선정, 연변(沿邊) 봉수에 연대(煙臺) 신축, 봉수 선로 확정, 관계 법령 설정하여 우리 봉수의 근간을 세웠다.
이를 세종봉수라고도 부른다. 낭연(봉수 흔들림 방지의 짐승 糞), 치고(정보 진위 여부 확인을 위한 장치), 연통(연기나 봉화를 올리는 장치), 연대(봉수대 보호용 대), 봉수대, 연조(봉화지피는 아궁이) 등 봉수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장치와 규격도 마련하였다. 연변봉수(접적 지역 정보수집), 내지봉수(정보 전달), 경봉수(서울 목면산 최종 봉수), 권설봉수(지방 수령 관할), 직봉, 간봉 등 봉수를 구분하여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봉수의 관리는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가 지방에서는 수령이 지휘 감독하였다. 봉수군으로 봉수마다 정원과 임무를 정하여 주었다.

우리나라의 봉수 특히 세종 때 완성된 봉수체계는 앞의 다른 나라나 종전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다.
2~4거화 등이 아닌 훨씬 발달되어 세련된 디지털부호 방식 즉 5단위 봉수 부호 방식의 통신체계였다.
단거리에 일방 연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5방향의 망을 구성하여 온 국토를 빠짐없이 연결한 경계 장치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가 없다.
전달 속도도 매우 빨라 전국을 한 나절 안에 소통할 수 있는 조기경보체계(전국 모든 봉수는 초저녁 무렵에 도달하는 京烽時限을 두었음)를 갖추어 실행되었다.
또한 군사적 변고가 있어야만 꼭 봉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으로 아무런 사고가 없을 때에도 반드시 1거(炬)를 올렸다고 한다.
평화와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표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전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를 생산 및 수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 통신 봉수의 전통이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6. 국토수호의 교육 및 관광자원 보령의 봉수대

보령시에서 발견되는 봉수대 터는 해안가에 이어지는 제5거 선로에 있는 간봉의 봉수와 충청수영이 관할하던 권설봉수로 인근 섬들에 세워진 것이다. 그 현황과 보존 상태를 표에 담아본다.

번호 명칭 역할 위치 및 고도 상태 기록 1 통달선 • 제5로 간봉 • 비인칠지산→ • →남포여도점 • 웅천읍 소황리 • 182.3m 완전 훼손 • 신증동국여지승람 • 동국여지지 2 덕산 • 제5로 간봉 • 비인칠지산→ • →남포여도점 • 웅천읍 죽청리 • 100.0m 희미한 흔적 • 세종실록지리지 3 등경산 (여도점(?)) • 제5로 간봉 • 남포 덕산 → (남포통달산→) • →보령조침산 • 남포면 제석리 • 180.2m 원형 변형 • 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동국여지지 4 옥미봉 • 제5로 간봉 • 비인칠지산→ • →보령조침산 • 웅천읍 두룡리 • 416.8m 5봉돈 흔적 • 여지도서 • 대동지지 5 신흥리 옥미봉 보조(?) • 남포면 신흥리 • 277.8m 희미한 흔적 기록 없음 6 대천리산성 고려시대(?) • 웅천읍 대천리 • 241.2m 민묘로 훼손 기록 없음 7 조침산 • 제5로 간봉 • 여도점 → (옥미봉 →) • →홍주흥양곶 • 주교면 송학리 • 228.9m 복원 훼손 • 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대동지지 8 흥양곶 • 제5로 간봉 •보령조침산 → • → 결성 고산 • 천북면 사호리 • 202.6m 복원 훼손 • 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여지도서, 대동지지 9 망해정 • 충청수영권설 • 오천면 영보리 118.7m 희미한 흔적 • 대동지지 10 원산도 • 충청수영권설 • 오천 원산도리 • 117.9m 원형 보존 • 대동지지 11 녹도 • 충청수영권설 • 오천면 녹도리 • 90.0m 원형 보존 • 대동지지 12 외연도 • 충청수영권설 • 오천 외연도리 • 273.0m 원형 보존 • 대동지지 13 어청도 • 충청수영권설 •군산옥서어청도 • 205.0m 원형 보존 • 대동지지 < 보령시 봉수 일람 (보령의 봉수대 / 2004년 조사 책자 참조)>

옥미봉 봉수대를 바라보니 우리 선조들의 창의적이고 지혜로운 조기경보체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지켜내려는 강렬한 선조들의 의지에 절로 고개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봉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방치가 몹시 부끄러워지기도 하다.
봉수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일깨우고 잘 보전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하겠다. 여기 옥미봉 봉수대에 서니 새삼 나라사랑 국토수호 의지가 불타올라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또한 사방으로 아주 멀리까지 호쾌하게 펼쳐진 바다, 산, 들, 하천 그리고 마을을 확인할 수 있으니 막혀있던 가슴이 뚫리고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나라사랑 정신과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어디 있으랴. 그뿐인가 창의적인 정보통신의 전통을 키워나갈 수 있는 교육의 장이자 관광자원으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끝) / ‘신재완의 보령문화산책 4’는 4월 중에 ‘남포읍성을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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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희
(180.XXX.XXX.183)
2019-05-07 17:48:46
보령의 봉수대
잔미산 옥미봉 봉수대 영원히 잊지 않을것 같네요.
봉수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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