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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보령문화산책4
/ 남포읍성Ⅰ
2019년 05월 20일 (월) 09:42:40 편집부 9319951@hanmail.net
1. 대대로 집짓고 살만한 땅, 보령


보령 지역은 예로부터 사람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한다.
서쪽으로 펼쳐진 너른 들과 사철 마르지 않는 내(川)가 있어 농사가 잘 된다.
청정한 바다와 살아 숨 쉬는 갯벌이 있어 갖가지 해산물도 흔하다.
거기다 동쪽은 높고 낮은 산이 겹겹이 이어져 산나물과 버섯도 많이 난다.
북쪽은 낮은 비탈과 풀이 많아 가축을 많이 기른다.
산과 계곡 그리고 맑은 내와 양양한 서해가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과 건강한 식생을 만들어 주니 곳곳에 정자와 명승지다.
산 속엔 백운상석, 오석이 나기도 하여 한국 최고의 벼루와 빗돌이 만들어져 왔다.
어디 그뿐인가? 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온난한 기후는 자연재해와 풍토병을 적게 한다.
옛날엔 중국에 최고 빨리,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항로가 개설되기도 하여 선진 문물 도입 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하니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 일컬어 왔을 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여기 보령이야말로 ‘대대로 집짓고 살만한 지역’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지역음식은 맛이 좋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산 흔적인 고인돌은 300기가 넘고, 한국 최고로 치는 남포벼루와 빗돌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산천과 계곡마다 들을 바라보는 마을이 들어서고, 15개 유인도를 포함 75개의 섬과 총 연장 270여 km의 해안선으로 어업은 발달하였고, 초기 불교의 전래, 선종의 개창, 성리학의 전파, 천주교와 서학 유입 등 새로운 선진 문물이 도래되는 것이야말로 보령이 사람살기 좋은 고장임을 말해준다.

2. 만세 보령을 탐한 왜구!

하지만 풍요롭고 넉넉하면서도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기에 ‘만세 보령을 탐한 왜구’ 등 외적들의 침입도 그치질 않았다.
외적들은 조운선을 탈취하고, 하천을 통해 내륙 멀리까지 침입하여 무자비한 약탈과 인명 살상을 자행하였다.
그 폐해는 날로 늘어나 국가 안위까지도 위협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외적의 침입은 예고가 없었고 늘 급작스러웠다.
어떤 때는 주민들이 여기 보령에 거주하지 못하고 그들을 피해 멀리 피난하기도 했다.
왜구들은 갈수록 대형 선단을 이루어 몰려왔고, 더욱 날래고 간교하였으며, 강도질에 맛들인 그들의 침입은 더욱 빈번하고 끊이질 않았다. 웬만한 대비로는 외적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3. 왜구 대비 남포읍성 축조

왜구로부터 주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내는 일을 더 이상 지역주민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체계적인 대비와 대대적인 관방시설의 축조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만 했다.
그래서 보령 지역엔 산마다 산성이, 남포현과 보령현 치소엔 읍성이, 보령 해안 접적 지역엔 충청수영성 등 영•진•보성이, 제5로 봉수선로와 충청수영 권설봉수 선로에는 봉수대가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보령의 지명에는 군사관련 이름이 많고 마을마다 왜구 격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이루어진 읍성은 그 규모와 설치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만큼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보령읍성과 남포읍성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읍성이 축조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본래 읍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지고, 곧바로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현재 읍성으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은 정조 때 축조된 화성(華城)이 대표적인 것이며, 이밖에 아래와 같이 손꼽아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역
현재 남아 있는 읍성

충청 해미읍성, 비인읍성, 남포읍성, 홍주성, 보령읍성
호남 남원읍성, 고창읍성(일명 모양성), 흥덕읍성, 낙안읍성, 진도읍성
영남 동래읍성, 경주읍성, 진주읍성(일명 촉석성), 언양읍성, 거제읍성
제주 제주읍성, 정의읍성, 대정읍성

4. 남포읍성으로 가는 길

읍성을 찾아봄으로써
① 선조들의 국난극복 의지
② 외적방비의 필요성
③ 군사적 방비의 기능
④ 지방 행정치소로서의 역할수행
⑤ 국가의 정체성 확립과 국왕통치의 상징 등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은 남포읍성으로 길을 나서 본다.

남포읍성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보령시내 중앙 수청사거리에서 보령남로(수청사거리~남포삼거리, 구 21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5km 남짓 내려가면 된다.
길은 양쪽으로 산과 철길이 나란한데 동쪽은 성주산과 옥마산이, 서쪽으로는 장항선과 등경산(남포면 봉덕리) 그리고 남포 간척지가 양 날개처럼 내려간다.
조선시대 보령현과 남포현의 경계인 궁천천을 다리로 넘어서면 남포면이다.
성주산 아래에 유서 깊은 북정자와 창동마을을 확인할 수 있고, 바로 이어지는 보령종합경기장을 끼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돌아 내려가면 세 갈래 길이다.
오던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과 서쪽 바닷가 월전리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데, 이곳이 남포삼거리다.
거기서부터 바로 나아가는 길은 충서로(남포삼거리~이어니재, 구 21번국도)라 부르는 지방도인데 몇 발자국 더 가면 동쪽으로 남포읍성이 보이고, 그 주변 일대가 모두 면소재지인 읍내리이다.
이곳 읍내리는 1914년 남포군, 보령군, 오천군이 하나의 보령군으로 통폐합되기 전까지 남포군 군내면 지역으로 남포군청이 들어서 있기도 하였던 곳이다.
도로 서쪽은 서문외(성밖이) 마을이고 읍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행정관서와 식당, 마트 등 상가들이 모여 있는데, 과거에 남포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동편 남포읍성으로 향하는 읍성향교길로 올라서니 바로 남포읍성이다.
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1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5. 청연포(淸煙浦)는 바다와 통하고

남포읍성의 축조와 변천은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처음 남포현 지역에 군사적 진성이 축조하게 된 것은 왜구가 자주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여말선초에는 그 폐해가 극성을 이루었고, 특히 고려 말 우왕 때는 남포현 지역민이 왜구를 피해 모두 떠나면서, 이 지역이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진성을 쌓고 대비하였다가, 왜구가 출몰하면 응징하기 시작했다.
김성우, 최영, 이성계 등이 바로 그 군대의 지휘관들이었다.
그러자 지역민이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영구적인 방비 시설인 성을 축조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지역민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지역 수령인 감무 혹은 현감을 파견하여 다른 지역처럼 국왕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도록 하였다.
성의 규모는 처음 고려 공양왕 때 군사적인 진성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점차 안정되면서 인구가 늘고 성 안에 일반 백성도 거주하는 읍성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면서 지방 통치조직과 공해도 들어오고 행정적인 기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세종 때 읍성을 쌓기 시작하여 문종 때 오늘날 규모의 읍성이 이루어지고 세조 때 드디어 현감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포읍성이 만들어진 계기와 변화 내용을 다음 기록을 통하여 알아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문헌 시기 내용 요약 의의 세종실록 109권 1445
• 세종27년 8월19일 경신 2번 째 기사 명 정통(正統) 10년
•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충청도 남포에 성을 쌓음
• 지난해 흉년으로 성 쌓기 정지: 금년 풍년으로 쌓기로 함
남포 축성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15세기
◎ 藍浦縣 : 本百濟寺浦縣(충청도 공주목 남포현)

• 백제 寺浦縣, 신라 지금 이름, 서림군(西林郡) 영현(領縣)
• 고려현종9년(顯宗) 가림현(嘉林縣) 임내에 붙임, 감무(監務)
• 홍무(洪武) 13년 왜구(倭寇)로 인물(人物) 사방 흩어짐
• 공양왕2년(恭讓王) 진성(鎭城), 유리(流離) 백성 안집(安集)
• 태조(太祖) 6년 진병마사(鎭兵馬使), 판현사(判縣事) 겸함
• 진산(鎭山) 구룡(九龍), 동쪽 홍산(鴻山) 34리, 서쪽 죽도(竹島) 10리, 남쪽 비인(庇仁) 27리, 북쪽 보령(保寧) 6리
• 180호, 949명, 군정시위군 2명, 진군 17명, 선군 61명
• 읍 석성(邑 石城) 둘레 3백 17보, 안 우물 3, 사철 안 마름

남포 내력 왜구 피해 관원 파견 읍성 축성 문종실록 9권 1451

◎ 삼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 정분(鄭苯) 보고

• 충청도(忠淸道) 각 고을의 성자(城子) 중 그대로 둘 곳
• 남포현읍성(藍浦縣邑城) 주위 2,476척, 높이 12척, 여장(女墻) 높이 3척, 적대(敵臺) 5소, 문(門) 3소 옹성(擁城), 여장 337개, 성 안 우물 2소, 성 밖 2리 방천(防川)에서 성 뚫고 끌어 못에 저수(貯水), 해자(海子)없음

성자 상태 읍성 규모
v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20권 16세기

◎ 藍浦縣

• 백제 사포현(寺浦縣), 신라 지금 이름 서림군(西林郡) 속현
• 고려 현종(顯宗) 9년 가림현(嘉林縣)으로 옮겨 붙임
• 감무(監務)를 둠, 신우(辛禑)때 왜구(倭寇)로 인민 흩어짐
• 공양왕2(恭讓王) 진성(鎭城) 설치, 流離 인민 안집(安集)
• 본조 태조 6년 병마사 겸 판현사(兵馬使兼判懸事) 둠
• 세조 12년 진(鎭)을 혁파, 현감 임명
• 읍성 - 석축, 주위 2476척, 높이 15척, 세 개의 샘
남포 내력 관원 파견 읍성 필요 읍성 규모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 18세기

◎ 忠淸道 藍浦縣

• 성둘레 825丈, 2,476尺, 950步, 높이 15척, 성가퀴 26첩
• 동•서•남문 옹성(甕城), 세 개 샘-길이•너비•깊이 각각 1장
• 현감(6품), 좌수(座首)1, 감관(監官)2, 군관(軍官)10, 아전(衙前)16, 지인(知印)6, 사령(使令)7, 관노(官奴)13, 관비(官婢)5
• 공해 객사(客舍) 9칸, 동헌(東軒) 5칸, 아사(衙舍) 18칸, 향청(鄕廳) 11칸, 작청(作廳) 8칸, 현사(縣司) 3칸
• 성안 창고 / 영창고(營倉庫) 10칸, 사창고(司倉庫), 군향고(軍餉庫), 저치고(儲峙庫), 군기고(軍器庫)

읍성 규모 읍성 조직 읍성 공해 읍성 창고

『보령군지(保寧郡誌)』

보령군지 1991

• 남포면 읍내리 231번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79호로 지정
• 고려 우왕 때 남포에 왜구 침입 인물이 흩어짐
• 공양왕 2(1390) 처음으로 진성, 流亡人 불러 모음
• 군사적 중요/ 民政官 郡•縣事 대신 軍政官 節制使•兵馬使
• 조선왕조 1397년 兵馬使겸 判縣事둠 군사적인 비중 큼
• 세조12(1466) 진 혁파 縣監 둠(80년간 진성과 읍성 겸함)
• 당초 현의 읍성(현재 읍성 남쪽 15리 고남포 치소)
• 고려 말 진성 둘 때 현 위치로 새로운 읍치 삼음
• 여말선초 沿海地域 읍성 조축계획 보령현 앞서 읍성 축조
• 처음/세종지리지<邑石城周回三百十七步内有井三冬夏不竭>
• 석축 둘레 317步 성안 우물 3개 사철 마르지 않음
• 다음/동국여지승람 둘레 2,467尺, 높이 15尺 3개 泉
•  규모확장(317步=1,902尺→2,476尺) 鎮城→읍성(인구 증가)
•  邑城 확장/世宗 때, 1451 (문종1)  9월 성터 보고
•  둘레 2476尺, 높이 12尺, 여장 3尺, 敵臺 5곳, 門 3곳 옹성
•  女墻 377타, 샘2, 성 밖 2里 개울 끌어 貯水, 垓字  없음
•  北門 없고 東•南•西에  모두 擁城 보령읍성보다 웅장
•  초기 邑城은 鎮이 혁파된 이후 보통 邑城 기능 바뀜
•  현재 읍성은 펑지에 위치한 平面 正方形
•   성곽 길이 894m, 敵臺 4개, 門터 3개, 水口 하나
•  성벽 많이  남음, 높이 4~5m, 윗부분 성벽 두께 1~1.5m
•  세종 때 築城新圖의 규식대로 축조되었음
•  아래  큰 石塊 2~3단 포갬, 오를수록 自然割石 막쌓음
•  특히 문을 만든 左右는 城石이 크고 고르게 남아있음
•   화강암 面 다듬거나 귀맞춤, 조선후기 성벽 보수 흔적
•  남문 도로로 흔적 없음, 서문 옹성 일부, 동문 옹성 있음
•  사방 귀퉁이 성벽 적대/ 평면 長方形 둘레 20~25m
•  西南方 敵臺 부근 水口(80cm×60cm 장방형) 있음
•  아래 바닥 板壯石 3枚, 위쪽 천정 板壯石으로 덮음
•  지금은 성안의 下水를 내보내는 排水口로 이용
•  성벽의 하부기단축석은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음
•  조선시대 읍성축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음
•  鎭西樓라는 官衙門이 남아 있음(藍浦縣의 상징)
•  성 안의 초등학교와 민가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움

6. 남포현 진산 구룡산(九龍山)은 어디에

남포읍성에서 주변을 바라 본 전경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잘 전해지고 있다.
‘청연포(淸煙浦)는 바다와 통하고, 옥마산(玉馬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靑煙徹海 玉馬撑天)라고 남포읍성의 전경을 노래한 김환(金丸)의 시가 적절하다.
여기서 ‘청연포’는 현재 남포 웅천 앞의 포구를 말하고 옥마산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남포읍성 뒤에 있는 산이다.
남포읍성 바로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고 뒤에는 높은 옥마산이 있는 정경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포읍성이 있는 곳이 본래 남포현의 치소가 아니고 고읍 혹은 고남포라 불렸던 수부리 수안이었다고 한다.
이는 ‘2003년 보령시刊 「남포읍성」 발굴 조사보고서’ 황의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글은 계속하여 조선 세종 혹은 문종 때에 이르러 지금 옥마산 아래로 남포현 치소가 이동되었다고 한다.
이동 연유는 아마 수부리 수안의 고읍은 웅천천 홍수 범람의 위험, 인구증가, 주민생활 불편 등이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옥마산 줄기를 배경으로 펼쳐진 너른 들의 한가운데 평지에 읍성을 쌓아서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수 있고, 바다가 바로 가까우면서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감시가 용이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치소가 옮기기 전이나 후에도 남포현의 진산을 동일하게 ‘구룡산’이라고 적고 있어 과연 진산인 ‘구룡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다. 고읍의 진산이 ‘구룡산’이라고 한다면 새로 옮겨온 읍성의 진산은 ‘옥마산’이라고 기록해야 맞을 터인데, 치소가 옮겨온 후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나 「여지도서」에도 여전히 남포읍성의 진산을 ‘구룡산’이라고 표기하여 오기 혹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2014년 대천문화원 刊 「남포현의 삶터 공간구조」 김명래 글’에서는 후대의 기록들은 전대의 ‘구룡산’ 진산을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단순 이기해 놓은 것이라고까지 적고 있다.
하지만 ‘새로 축조된 읍성의 진산이 구룡산이다.’라는 기록은 오류 혹은 ‘전의 내용을 검증 없이 그대로 이기한 것’이라고 말하려면 다음 3가지 사실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① 구룡산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를 확인하고,
② 진산의 의미를 좀 더 규명해야 하며, 특정 지역을 지칭하여 현에서 떨어진 거리를 따질 때는 과연
③ 기준점이 어디인지도 확실히 해야 한다.
혹시 ‘구룡산’이란 ‘옥마산’에서 시작하여 ‘봉화산’과 ‘잔미산’을 모두 포함하는 길게 늘어진 산 전체를 이름 하는 것은 아닌지? 진산의 본래 의미가 단순히 북쪽이라고 하기보다는 배경이 되는 지맥의 원천을 진산이라 부르는 것은 아닌지? 지역의 거리를 나타내는 기준점은 단순 치소의 중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중심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알아볼 일이다.

7. 남포읍성 주변 관방 시설

남포읍성의 외적 대비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주변에 산성과 봉수대가 설치 운영되었다.
읍성과 상호 유기적인 소통과 보완으로 군사적 대비의 효율성을 높인 시설이다.
여기 산성은 남포읍성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봉수대는 읍성에서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에 주변 상황과 적의 침입을 사전에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주변 산성과 봉수대의 관리와 운용은 남포현감의 주요 책무이기도 하였다.

대봉산성(臺峰山城)과 등경산 봉수대(登冏山烽燧臺, 일명 余道岾 烽燧臺)

• 남포면 읍내리 서쪽 2km에 제석리와 삼현리의 경계, 해발 180.2m의 봉산(등경산)
• 정상 봉우리 부분을 띠(帶)처럼 둘러싼 석축의 산성으로 상당히 험준한 편임
• 성벽은 사면을 석축으로 구축, 전형적인 백제의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
•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없고 전체가 무너져서 만들어진 형태만 남음
• 모두 무너진 돌로 나무가 자라지 않아 멀리서도 성의 흔적이 뚜렷함
• 성의 남북 폭 82m, 동서 폭 103m 정도(돌무더기 상부 기준) 전체 둘레400m 정도 산성
• 봉산 채취 석재, 성벽 급경사, 외면만 축조, 내부 통행로 넓이 2~3m 정도
• 성의 주향은 동편의 소송리가 아니라 서향한 제석리 방향으로 바다 경계임을 짐작
• 산 정상부에는 봉수대가 있음
• 성내부 수습 유물 거의 없고, 석성 주변에서 파도무늬 기와편, 백자편, 시루편 등 발견
• 남포읍성이 지척 간에 보이고, 남쪽 달산리 산성, 서쪽 바다가 훤함

달산리산성(達山里山城)

• 보령시 남포면 달산리 서남항의 남포저수지에 남접한 낮은 야산에 위치한 토축산성
• 달산리와 옥서리의 경계, 백제식 삭토(削土)의 방법으로 만든 산정식산성
• 전체 성의 둘레는 약 300m, 남벽은 삭토하지 않고 성토했는데 성벽이 30m쯤 있음
• 남벽의 내부 상당히 넓은 면적의 평탄지가 있는데, 밭으로 경작되고 있음
• 산의 지세 상당히 험준함, 거의 삭토로 구축해 내부에 자연스런 평평한 통행로 있음
• 문지로 확인되는 곳은 동문지 뿐임, 넓이 2.8m 정도, 민묘 1기 위치
• 산의 정상부에는 평탄한 대지가 20~30m 정도 있는데, 조그마한 건물지로 추측
옥미봉 봉수대(玉眉峰 烽燧臺)

『여지도서』 남포현 봉수조에
• ‘남쪽 비인현 칠지산봉수에 응하고 북쪽 보령현 조침산 봉수에 응한다.’라고 기록된 봉수
• 옥미봉 봉수는 조선 전기에는 없다가 18세기에 신설된 봉수대
• 남포면 사현리와 웅천읍 두룡리•수부리의 접경에 있는 잔미산의 정상에 있는 봉수대
• 해발고도 416.8m, 21번 국도의 이어니 재 남쪽 오석공방 옆으로 산 능선을 타고 오름
• 칠지산과 조침산과의 직선거리는 도상거리로 모두 14㎞로 같다.

8. 남포읍성 밖 국가 정체성 시설

남포현 연안으로 침입해오는 왜구 등 외적을 막아내기 위해 처음 진성이 축조되었다.
진성의 진가는 외적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면서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진성은 단순 군사적 대비뿐만 아니라 점차 지방 통치기능이 첨가되고 국왕의 통치 이념이 실현되는 중앙정부 파견 수령 근무의 읍성으로 진화되었다.
남포읍성의 책임자 남포현감은 외적 방비의 최전방 지휘관이자 국왕을 대신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백성의 삶을 돌보는 행정가로서도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성 밖에 통치 이념 실현의 교학시설과 국가적 정체성 확립의 제사 시설을 세우고, 성내에 다양한 지방행정 담당의 공해를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향교는 일읍일교의 원칙에 따라 필수 시설이며 문묘의 대성전을 중심으로 교학시설인 명륜당을 갖추고 있다.
남포향교는 성 밖 동쪽 남포면 옥동리 옥마산 산록에 있다.
지금도 향교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고, 교학 기능은 사라졌지만 제사 기능은 여전히 유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직단은 성 밖 서쪽 남포면 오야들 재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은 중앙과 지방 고을마다 사직단을 조성하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범을 정하여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말한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함께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여단(厲壇)은 성 바깥쪽 북쪽 옥동리 장태 말에 있었다고 한다.
여단이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 지내주던 제단을 말한다.
제사는 1년에 세 차례 지냈는데, 봄에는 청명일(淸明日), 가을에는 7월 보름, 겨울에는 10월 초하루에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성황사(城隍祠)는 성 밖 봉덕리 고루머리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성황사는 성지(城池)를 수호하는 성황신을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성황신은 본래 국가수호의 의미를 가진 신(神)이었으나 점차 민간 신앙화 되어 서낭이라고 부르고 서낭당을 모시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군현에서 쫓겨나 고개나 산마루에 돌무더기나 사묘(祠廟)의 형태로도 남아있다.
남포현의 사직단, 여단, 성황사는 현재 모두 멸실되어 찾아볼 수 없고 「여지도서」 등에 다음처럼 그 존재 여부만 전할 뿐이다.
『輿地圖書』/忠淸道/藍浦/壇廟
社稷壇在縣西四里 中略…城隍祠厲壇在縣北二里…
이와 같이 남포읍성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고 다양한 시설을 갖추어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성내 공해시설에 대해서는 다음 <남포읍성 Ⅱ>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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