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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완의 보령문화 산책5
남포읍성Ⅱ-역사의 맥을 찾아서
2019년 05월 24일 (금) 13:34:53 편집부 9319951@hanmail.net
1. 무너진 옛 성벽

무너진 옛 성벽에서 남포읍성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찾아보기는 어렵다.
축조 이래 500여 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 나라의 혼란과 주권 부재로 인한 방치 그리고 개념 없는 훼손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많던 공해 건물 중 일부만 남고 거의 다 사라진 것을 보노라면 여간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일부 복원한다고 하여 엉뚱한 돌담을 쌓아 놓았으니 실로 참담할 뿐이다.
성벽을 복원하여 놓은 곳은 전체의 절반 정도가 된다.
방형의 성벽 둘레 중 서벽 일부, 서북치성, 북벽, 동북치성, 동벽 일부가 해당된다.
복원된 곳의 모습은 일정한 크기의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일률적으로 같은 높이의 층으로 쌓았다.
상층부에는 미석도 설치해 놓았다. 하지만 원래 성벽과는 사뭇 다르다.
축조 방식부터 그 모양까지 전혀 딴 판이다.
본래 성은 서로 모양과 크기가 다른 자연할석을 가공 없이 ‘허튼 층 쌓기’로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잘 다듬은 석재로 일률 크기의 ‘바른 층 쌓기’를 하였으니 원래의 모습과 옛 성의 정취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히려 복원하지 않고 내버려 둔 나머지 절반에서 본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동문, 동벽 일부, 동남치성, 남벽, 남문, 남문옹성, 남서치성, 서벽 일부가 복원하지 않은 부문이다.
복원하지 않은 곳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여기 저기 허물어지고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그래도 본래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형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역사의 맥을 찾아서

역사의 맥을 찾아서 읍성 안으로 들어가 옛날 자취를 살펴본다.
성 안은 서문에서 동문까지 일직선의 성 안 중심도로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도로는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남포읍성뿐만 아니라 한양 도성을 비롯한 한국의 성들이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성 안에 남포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중간부터 동문 앞까지 종전 도로 일부가 끊기고 대신 초등학교를 우회하는 새 도로가 생겨나 본래 모습을 짐작하기가 힘들 뿐이다.
서문 앞에 서니 큰 돌담인 성벽이 양편 남과 북으로 이어져 있다.
성벽의 축성은 사방이 거의 같은 유형의 돌로 내내 같은 방법으로 축조되었다.
기초가 되는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은 돌로 4m 내외의 높이로 쌓았다.
자연에서 수집한 돌을 그대로 쌓으면서 성돌 사이마다 주먹 크기의 쐐기돌로 메워 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 안에 내탁부를 설치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성벽에 올라서면 미석(楣石)과 여장(女墻)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벽이 동벽보다 약간 길어 사다리꼴 모양이다.
정문(旌門) 겪인 읍성의 서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서문엔 문이 있던 자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른 돌담이 있는데 바로 서문 보호의 옹성이다.
안쪽엔 사각형 성 높이의 대를 이루어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장치가 있었는데 바로 문둔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문에서 동문까지 이어지는 길(현재 중앙의 읍성향교길)을 중심으로 성안을 남북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남문지에서 출발하여 동서의 중심 길과 교차하여 네거리가 생겨 성안이 네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동서로 나눈 길의 북쪽지역은 주로 동헌, 공해, 성내 백성들의 집이 들어섰던 곳이다.
하지만 북쪽의 아랫부분은 몇 그루 노송, 한 무더기 참나무, 한 줄의 감나무와 민가 1채 그리고 자그마한 논과 밭이 있어서 그 옛날 공해가 들어섰을 것이라는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 다만 북쪽의 윗부분은 남포초등학교 담벼락이 둘러쳐진 바깥으로 외삼문인 진서루, 내삼문인 옥산아문, 동헌, 역대 현감들의 공적비가 몇 개가 남아 있다.
3. 남겨진 남포현 관아

○ 관아 외삼문 진서루 / 청룡과 황룡이 겨루고

관아 외삼문 진서루(鎭西樓)는 ‘서쪽을 경계하여 진압한다.’는 글자(鎭西)가 새겨진 현판을 달고 있다.
이 읍성이 군사적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동헌의 서향 외삼문으로 성내 가장 우뚝하게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한 2층 문루 건물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 전국각지 읍성마다 같은 것인데, 이를 통해 조선이 중앙집권국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누하엔 기둥모양의 장초석 위에 8각 기둥이 10개이고, 가운데 2개의 기둥에만 자연석 덤벙 주초에 그렝이질을 하여 세워져 있다.
누하에 3개의 문이 조성되어 현청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문루에 오르려면 남쪽에 난 7단의 나무계단을 통해야하고, 문루엔 누마루를 깔았는데 우물마루이다.
문루 남쪽 1칸은 여닫이 나무문을 설치하였고 또 1칸은 낙양각이다.
나머지 삼면은 27개의 풍혈을 새긴 계자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천장엔 황룡과 청룡이 그려진 두 개의 큰 들보가 지붕을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
서까래 등 부재들이 속속들이 잘 보이고 벽체의 창방과 도리 그리고 종량에도 전통단청 문양이 그려져 있어 볼만하다.
공포는 초익공의 주심포 형식에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날렵한 팔작지붕이다.
문루는 주변 멀리까지 훤하게 내다볼 수 있고, 회의, 소통, 지휘, 연회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과연 ‘현재 진서루의 위치가 최초 설치된 장소와 일치하는가?’하는 점에 대해선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내삼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이 있고, 대부분의 성문의 정문에는 군사적 방비(진남루, 진서루, 해산루 등)를 상징하는 현판이 내걸리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 남포읍성에는 어색하게도 외삼문에 그것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 내삼문 옥산아문

내삼문 옥산아문은 진서루와 같은 서향이고 붉은 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옥산아문(玉山衙門)이라고 새긴 현판이 붙어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면 7칸으로 중앙 1칸은 솟을대문에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이며 단청을 하였다.
중앙 대문에 붙은 좌우 양쪽 1칸씩은 홍살로 벽을 투명하게 세웠고, 그 바깥으로는 2칸씩 익랑을 두었는데 북쪽 익랑은 창살문과 온돌을 설치하여 방을 꾸몄고 남쪽 익랑은 판장벽을 둔 창고형 빈 칸이다.
여기서 중앙 3칸에 해당하는 8(세 칸의 앞뒤, 4×2)개의 기둥은 원형이고 나머지 8개는 사각이다.
원형 기둥 아래는 잘 다듬은 원형 주초가 받치고 있고, 나머지 기둥은 덤벙주초에 그렝이질을 하였다.
진서루와 옥산아문 사이 오른쪽에 비석 9기가 있다.
조선시대 남포현의 현감, 군수들의 선정 내지 불망비로 화강암 석재로 된 사각형 비석이다
. 선정비 5기, 불망비 3기, 내용을 알 수 없는 비 1기다.
남포에서 웅천으로 내려가는 21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웅천읍 두룡리에 비석군(碑石群)이 보이는데 그곳에도 조선시대 남포현 현감이나 군수들의 공적비가 더 있기도 하다.
특별한 공적의 내용이나 기릴 내용이 적혀있지는 않다.
○ 옥마산 배경 아래 격조 높은 동헌

내삼문 지나니 옥마산 배경 아래 격조 높은 동헌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바로 남포현 현감이 집무하던 현청이다.
지나온 외삼문 그리고 내삼문과 같은 방향의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기단은 30cm 정도로 매우 낮고 뒷면을 제외한 3면에 넓게 펼쳐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방과 대청이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조성되어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단청은 하지 않았다.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얼마 전까지 남포중학교의 건물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주심포에 초익공이고 홑처마로 단순하면서도 품격이 있다.
앞면 왼쪽부터 2개 기둥은 높은 장초석 위에 바로 세웠고 나머지 6개 기둥은 자연할석 그대로 덤벙주초에 그렝이법으로 세웠는데 모두 원형이다.
정면에서 보아 왼쪽 1칸과 앞줄 1칸은 툇마루를 행랑처럼 꾸몄고 이어 1칸은 온돌방이고 이어 2칸은 대청마루이다. 또 이어 2칸은 온돌방이고 끝 1칸은 툇마루이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뒤쪽으로 가면 건물 높이의 절반 크기의 굴뚝이 아주 멋들어지게 들어서 있다. 건물 뒤에서도 출입할 수 있게 꾸며 놓았고 온돌방 아래에는 아궁이가 보인다.
동서 중심로 아래 남쪽은 객사와 공해 일부 그리고 민가가 들어섰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남포초등학교가 들어선 자리엔 원래 객사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군기고, 작청 등 창고나 공해 건물이 들어섰던 것으로 지금은 포도밭, 채소밭, 민가 1채, 남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 객사 건물은 초등학교 교실로도 활용되었다고 하며, 1960년대에 남포초를 다녔던 사람들의 졸업 앨범에 객사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보이기도 하다.
지금은 객사 건물은 흔적도 없이 모두 헐리고 대신 현대적인 학교 교실이 들어서 있다.
○ 동문 옹성은 본래 모습 그대로!

동문 옹성은 본래 모습 그대로 있다기에 성벽에 올라본다.
성 안 어디에서나 사방으로 둘러쳐진 성벽에 쉽게 오를 수 있다.
동헌을 보고 난 뒤, 높이 4m 내외의 성벽에 올라본다.
성벽 앞 3m 정도에 난 폭 40cm 정도의 배수로를 넘으면 성벽까지 기울어진 내탁부를 지나야 성벽에 올라설 수 있다.
성벽 위에는 폭 1m 내외의 길이 나 있다.
본래 그 길 위에는 사방에 370 여 개의 여장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성벽에 서면 성 안과 성 밖이 훤하다.
성 밖 동쪽을 바라보니 가까이 논과 밭이 있고 이어 옥동리 마을과 그 뒤에 옥마산이 우뚝하다.
높은 산은 마치 동쪽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예전부터 있었던 동문에서 나가는 길은 지금은 읍성향교길이라 부르는데 옥동리 마을을 지나 옥마산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길이 끝나는 곳, 산 아래에는 남포현 최고 교학기관었던 남포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동북치성으로 나아가면서 ‘내 몸 숨기며 성 가까이 다가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여장(女墻)’이 있었던 자리, 영동(永同) 등 인근 지역 백성들까지 동원하여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 전투 중에 성 위의 병사 보호를 위해 여장 아래이면서 성벽 막바지인 곳에 20cm정도 눈썹처럼 내밀어 쌓은 미석(楣石),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나란한 성벽 중간에 간간이 꿩의 깃털처럼 내밀어 쌓은 치성(雉城) 그리고 성벽 아래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해자(垓子)로 짐작되는 부분,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동문 보호의 옹성(甕城)을 찬찬히 볼 수 있다.
그 옛날 급작스럽게 침입해오는 왜구로부터 이 땅과 백성을 지켜냈던 성의 구조물들이다.
새삼 선조들의 국토 수호의지와 효율적 대비의 지혜를 살필 수 있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동문 곁의 성 안에는 읍성의 연륜만큼이나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주변 하늘을 다 덮을 만큼 사방으로 높은 가지를 키우고 가지마다 푸른 잎을 돋아내서 큰 그늘을 만들고 있다.
속이 다 썩어 누런 부스러기가 날리고 검은 부새를 보이면서도 오백년 넘게 끈질기게 살아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성을 찾아온 이에게 그 오랜 세월 이 땅 지킴이 읍성의 내력과 역사의 맥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문 옹성에서 내려와 성 안에서 남문으로 가려면 내내 새로 난 읍성향교길을 이용해야만 한다. 길 위에 서서 성벽을 보니 동남쪽 성벽은 방금 지나온 북벽과는 달리 옛날 모습 그대로다.
남문 가까이 동남쪽 성벽에 다시 올라 동남치성으로 나아가니 성벽 바로 앞에 성 밖 큰 동네가 펼쳐져 있다.
‘동문밖’, ‘중뜸’, ‘저잣거리’(한 때 2, 7일 날 5일장이 열리기도 함), ‘냇가말’이라는 자연부락이 연이어 있다.
얼마 전까지 100호~120호에 이르렀고 읍내리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동쪽 동네 밖은 봉화산이고 바로 아래는 남포저수지로 이어지는 읍내천이다.
그 냇가 바닥에는 담장 쌓을 만하고 가슴에 안을 수 있을 만한 둥글넓적한 돌들이 지천이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멋들어진 돌담이 둘러쳐져 있고 담장 옆으로 마을길이 이리 저리 나있다.
여기 읍내리 출신들을 만나 어린 시절을 얘기할라치면 그들은 으레 이야기 배경에 바로 저 돌담장과 마을길을 등장시키곤 한다. 돌담장과 그 길엔 그들의 추억이 서려 있을 터이다.
○ 지금도 유용한 수구

모든 것이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지만 지금도 유용한 수구를 찾아본다.
남문 앞에 집들이 몰려 있고 남문 안과 밖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동네집들이 남문지와 그 주변 성벽에까지 붙어있다.
성벽과 옹성의 일부분이 민가의 내부 혹은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그 옛날 남문과 옹성이 많이 훼손되었고, 심지어 성벽을 함부로 변형시켜서 본래 자리마저 정확히 구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최근 문화재 보호 당국에서 민가를 매입하여 국가에 귀속시켜, 본격적으로 남포읍성의 문화현상을 발굴조사하고 있다.
어서 본래 읍성의 남문의 자리와 모양이 정확히 규명되어 남포읍성의 보존 및 보호 조치가 잘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남문에서 성 밖으로 나와 남포읍성 탐사 출발지 서문으로 향하다 보면 남서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저기에서 멀리 성 밖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적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옆의 성벽 아래에는 수구가 하나 발견되는데, 그 옛날 기록에 나오는 남포읍성 내 유일한 바로 그 수구다. 본래 자리에 있으면서 크게 훼손되지 않았고 지금도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엎드리면 사람 하나 간신히 드나들 정도 크기의 수구는 지금도 성 안의 빗물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유용한 배수구로 활용되고 있다.
4.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는 남포읍성

○ 남포지방에도 지진이 있었다.
남포지방에도 지진이 있었다.
오늘날 남포를 비롯한 보령은 지진 안전지대라고 하지만 조선 500여 년 동안 수차례 지진이 있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번호 발생 일자 주요 내용 1 세종24년(1442) 9월12일 충청도의 남포·홍산·은진에 지진이 일다.
2 세종30년(1448) 1월 1일 충청도의 남포·서천·한산·은진에 지진이 나다.
3 연산 9년(1503) 8월 23일 서울과 충청도 및 경상도 고을에 지진이 일다.
4 인조11년(1633) 6월 10일 공청도 남포 등지에서 지진이 나다
5 현종 2년(1661) 8월 4일 남포현(藍浦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6 숙종39년(1713)12월 12일 충청도 남포 등지에 지진이 일어나다.
○ 65세에도 군역을 면하지 못한 백성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 11월 14일에 임금이 사헌부에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충청도 남포군 현감 김요율을 왕명으로 잡아다가 조사하게 하였다.>의 기록이 눈길을 끈다.
그 사건 개요와 조치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이중(李重)이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남포(藍浦) 봉화군(烽火軍) 이덕명(李德明)이 중(僧) 학수(學修)를 찾아가 부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같은 봉화군 한영(漢永)과 함께 도망, 군역(軍役)을 피하였는데, 이인우(李仁右), 이홍생(李紅生)이 이덕명을 몰래 숨겨두었으니 이덕명은 응당 장(杖) 1백 대를 때리어 변방(邊方)에 보내고, 학수는 장(杖) 80대를 때리어 아울러 환속(還俗)하여 당차(신분에 맞춘 강제 노역)하고, 한영, 이인우, 이홍생 등도 또한 장(杖) 1백 대를 때리어 변방으로 옮기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중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에게 한 도(道)를 맡긴 것은 마땅히 형벌을 삼가라는 것인데, 경이 급하지 않은 일에만 너무 살피어 중(僧) 학수를 형문(刑問)한 것이 두 차례에 이르렀으니, 그 죄는 묻지 않아도 알 것인데 무엇을 묻느냐?
부처를 배척하기를 일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봉화군 이덕명이 나이 65세가 되었어도 오히려 면방(免放)하지 않으므로 그 역사(役使)를 견디지 못하여 삭발(削髮)하기에 이르렀는데, 경이 이덕명의 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멀리 변방으로 쫓아낼 것을 계청(啓請)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학수·이덕명·이인우·한영·이홍생 등을 빨리 놓아 보내라. 지금 국가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절집의 중들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이미 일찍이 하교(下敎)하였거늘, 경이 직책이 감사(監司)에 이르도록 아직 듣지 못하였는가?
또 도첩(度牒) 신분증이 없는 중이 한 나라에 퍼져 있는데, 경이 모조리 찾아내는 일을 우선 할 일로 하였는가? 설령 경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더라도 경이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한갓 요란하고 번거로운 일이 될 뿐이고 백성을 다스리는 큰 뜻은 아니다. 경이 내 뜻에 신명을 바쳐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일은 보고하지 못하고, 그저 쫀쫀한 말단의 사무만을 첫머리로 먼저 거행하니, 어찌 위임한 뜻이겠는가?
삼보(三寶)를 무너뜨리고 훼손하는 일을 우선하는 것은 오늘날 간신(姦臣)의 일이다.
이제부터 중을 함부로 하여 우려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이며 백성을 다스리는데 큰 뜻을 잃지 말아서 효율적인 공을 생각하여 전의 과오(過誤)를 속죄하라.>하고,
이로 인하여 사헌부(司憲府)에 전지하기를, <모든 군정(軍丁)으로 나이 만 60세가 된 자는 면방(免放)한다고 나라에 정한 법이 있는데, 지금 남포현(藍浦縣) 봉화군 이덕명이 나이 65세가 되었어도 현감(縣監) 김유율(金有慄)이 면방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삭발하기에 이르렀으니,
당연히 수령(守令)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다. 잡아다가 추국(推鞫)하여 아뢰라.>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이란 나라는 통치의 최우선 과제가 민생안정이었음을 알리고 있고, 과도하게 형벌을 남용하거나 민생 돌보기를 게을리 한 목민관에게 엄한 문책이 따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군역이 60세까지 지워졌고 그것이 매우 고통스런 부담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 임진왜란 진주성 싸움에 참전한 남포현 군인들

선조26년(1593) 7월16일 보령사람 정로위 인발(印潑)의 말(言)로 진주성 함락 보고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보고하기를 <신들이 진주를 외원(外援)할 목적으로 삼가(三嘉) 고현(古縣)에서 진군(進軍)하였는데, 척후장(斥候將)인 안인무(安仁武)·김억린(金億麟) 등이 와서 고하기를 ‘발가벗은 남자가 수풀 사이에서 걸어 나오기에 잡아서 물어보았더니
「나는 본래 충청도 보령(保寧)에 사는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이다. 충청 병사의 군관(軍官)으로 6월 23일 함안(咸安)에서 진주로 옮겨 갔는데, 왜적이 이달 22일 아침나절에 의령(宜寧)에서부터 무수히 쳐들어와서 본주(本州)의 동문(東門) 밖 산 위에 주둔하여 많은 포(砲)를 일제히 쏘았다.
적세(賊勢)를 탐지하려고 와서 함께 성 안에 있던 중국 군사 20여 명은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한 것을 보고는 곧바로 성에서 나갔다. 우리의 제장(諸將)으로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본주 판관(本州判官) 성수경(成守慶),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浚民),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태안 군수(泰安郡守) 윤구수(尹龜壽), 결성 현감(結城縣監) 김응건(金應健), 당진 현감(唐津縣監) 송제(宋悌),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예수(李禮壽), 황간 현감(黃澗縣監) 박몽열(朴夢說),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 본주 목사(本州牧使) 서예원(徐禮元) 등이 성 안에 유진(留陣)하고 있었는데 이달 20일 오후에 왜적 2백여 명이 동쪽의 성 밑으로 진격해 왔다. 얼마 후에 접전하였는데 여러 명이 화살에 맞자 퇴각하였다. 22일부터 28일까지 왜적이 사면을 포위하였는데,
그 넓이가 5리 가량이나 되었으며 나머지 군사를 1일정이나 2일정, 혹은 4일정 되는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인근 각 고을의 요해처(要害處)가 될 만한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에 가득히 모여 매복(埋伏)하여 아군(我軍)의 사이를 격리시켜 외원(外援)을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대나무로 높은 사다리를 많이 만들고 그 사다리에다 진흙을 발라 가지고 성 안을 압박(壓迫)하고 그 위에서 포(砲)를 쏘아대어 탄환이 비처럼 쏟아지므로 성 안에서 탄환을 맞아 죽은 자가 하루에 1백여 명씩이나 되었다.
병사 황진(黃進)도 28일 이마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29일 오후에 왜적의 모든 진(陣)이 성 밑으로 가까이 와서 일시에 성을 함락하니, 성 안에서는 혈전(血戰)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성 안의 장사(壯士)와 대소 남녀들의 생사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나는 그때 신북문(新北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힘껏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밤을 틈타서 몰래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험한 길을 걸어가 순찰사(巡察使)에게 진주성이 함락된 연유를 고하려는 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보령사람 인발에 의해 보고된 ‘남포현감을 비롯한 남포현 사람들이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전멸당한 경위’가 비교적 자세하여 앞으로 이의 구체적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
○ 이몽학의 난 진압에 앞장 선 남포 현감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적 방비 등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력을 한 데 모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임금은 전쟁발발 보름 만에 ‘나 혼자만이라도 살자’며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훈련되지 못한 관군은 적이 오기도 전에 도망가기 바빴고 군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등 국가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할 지배층은 당쟁 속에 사분오열하였으니 참으로 원통할 노릇이었다.
오죽하면 전국 각지에서 뜻있는 백성들이 의병을 규합하여 나섰겠는가?
의병들의 필사적인 저항과 의병 존재 자체를 가볍게 여긴 일본의 잇따른 패배는 일본이나 조선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과 명의 구원 군대 도착은 양상을 사뭇 다르게 하였다.
이때 선조를 비롯한 조선 지배층은 의병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들을 홀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목숨 걸고 싸운 의병진과 조선조정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끝내 조선조정에 반기를 든 사람까지 나타났다. 그 중 하나로 ‘이몽학의 난’ 등이 있게 된 것이다.
선조 29년(1596)7월1일 / 이몽학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적의 무리는 해산되었다.

~ 생략 이때 남포 현감(藍浦縣監) 박동선(朴東善)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수사(水使)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로 나아가 홍주를 구원하자고 하니, 수사는 동선에게, 자기에게 와서 상의하라고 했다.
동선은 즉시 군병을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진군하자고 하자, 수사 최호가 ‘수군(水軍)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다.’ 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동선은 큰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계교하는가.’하였다.
드디어 수영(水營)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였고 보령 현감(保寧縣監) 황응성(黃應聖)을 시켜 본현(本縣)의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 중략~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반란군은 밤에 청양까지 도망하였고, 이몽학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億明), 태척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고 머리를 베었고, 이몽학이 죽자 이몽학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면천(沔川)에서 형세를 살피고 움직이지 않던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하다 잡혔다.
한현을 비롯한 이 난에 가담한 자들 중에서 죄가 무거운 자 100여 명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경중에 따라 처벌되니 이로써 이몽학의 난은 평정되었다.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 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 남포읍성을 접수한 의병장 민종식

한때 남포읍성을 접수한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선생은 철종 12년(1861) 3월 경기도 여주에서 민영상(閔泳商)의 독자로 태어났다.
증조부인 민치병(閔致秉)이 명성황후의 생부인 민치록(閔致祿)과는 재당질 간으로 고종의 외척인 여흥 민씨이다.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역임하는 등 종2품에까지 올랐으나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 살던 충청도 정산으로 낙향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의 동지가 되었다.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상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의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영익과 민영휘 등 여흥 민씨의 당대 고관들을 만나 상소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설과 김복한이 피체, 구금되고 이설이 작성한 상소문마저 압수당하자 선생은 충남 정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낙향하여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침 홍주 을미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성·청양 일대의 재지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생은 의병의 총수 자리에 올랐다.
선생은 의진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채광묵·박창로·이용규·홍순대·박윤식·정재호·이만직·성재한 등이 있다. 이어서 통문을 발표하고 각국의 공사에게 청원문을 보냈다.
의진 편성을 마치고 선생은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석한 의병은 600여 명에 달했다.
두 번째로 1906년 5월 9일 부여 지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서천을 거쳐 홍주성으로 나아가던 중 먼저 남포읍성에 들어오려 하였다.
남포성에서 5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홍주의병은 남포성을 함락하고 남포군수를 감금시켰으며, 관군 30여 명을 의병에 귀순시켰다.
이때 남포의 유생 유준근을 비롯하여 유회군 30여 명도 영입하였다.
또 남포 부근의 용동에서 일본인 석공 2명을 체포하여 그 중 한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 홍주의병은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진입에 성공하였다.
다음은 민종식이 체포되고 그의 재판내용의 일부이다.
고종 44년(1907) 7월 3일 조중응이 민종식의 공술을 보고하다.
법부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전술 내용 생략) 병오년(1906) 봄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같은 해 4월 18일에 홍산(鴻山)에 모여 서천(舒川)으로 들어가 총과 탄환을 취하고 남포(藍浦)에 들어가서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보령(保寧)을 거쳐 결성(結城)에서 자고 같은 달 26일에 홍주성(洪州城)을 들어가 점거하니, 총을 멘 군사는 600여 명이고 창을 든 군사가 200여 명이었으며 무기를 가지지 못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이 300여 명이었습니다.
제가 대장이 되고 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은 서로 중군(中軍)이 되어 박영두(朴永斗)를 선봉(先鋒)으로, 정해도(鄭海燾)를 후봉(後鋒)으로, 채경도(蔡敬燾)를 유격장(遊撃將)으로, 최상집(崔相集)을 소모장(召募將)으로, 박윤식(朴潤植)을 군량관(軍糧官)으로, 박제현(朴齊賢)·성재평(成載平)을 운량관(運糧官)으로, 이식(李侙)·곽한일(郭漢一)·유준근(柳濬根)·채광묵(蔡光默)·김광우(金光佑)·이용규(李容珪)·이상구(李相龜)를 참모(參謀)로 하고 김상덕(金商悳)을 군사(軍師)로 하여 27일부터 윤4월 8일에 이르기까지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다가 죽은 일본 사람이 10여 명 정도이고 생포하였거나 총살한 자는 전후에 걸쳐 도합 4명입니다.
같은 날 한밤중에 제가 패주할 때 저희 무리들이 성 동문에서 전사한 사람이 틀림없이 몇 명 있겠지만 그 수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신으로 성을 넘어 결성(結城)에 들어갔으며 각지로 돌아다니며 잠복해 있다가 공주(公州) 지방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생략)
민종식과 그의 의병부대가 저 남포읍성 서문으로 보무 당당히 들어섰을 광경을 그려본다.
그들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온 몸으로 항거하고 완전한 주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총칼을 들었다.
그들이 홍주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들렀을 여기 남포읍성에서는 사기충전과 부대정비를 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붉은 마음이 서린 남포읍성을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들의 나라사랑을 생각해본다.
/ 다음 <신재완의 보령문화 산책6>은 ‘화암서원을 찾아서’를 싣겠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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