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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최초의 인문학 토크, <조선시기 충청우도 향촌사회사> 저자 김영모 교수와의 대담
2024년 07월 03일 (수) 20:33:02 조광석 ksym0517@hanmail.net
   
지난 4월 23일 보령문화의 전당 대강당에서 개최된 보령시 최초의 인문학 북토크가 세간의 화제다.

이에 이날 진행된 대담내용을 정리하여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질의(Q): 류용환 교수(목원대)
응답(R): 김영모 교수(충남대)
Q: 안녕하십니까? 대담진행을 맡은 목원대 류용환 교수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본 대담의 진행에 앞서 먼저 김교수님 개인과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전공이 프랑스어인데 뜬금없이 우리역사 특히 향촌사회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R: 예, 제 전공이 프랑스어발달사이다 보니 프랑스 역사, 사회문화 공부는 필수였고 특히 필사본 비교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필사본 비교연구를 통해 프랑스 향촌사회의 변화추이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록문화인 족보나 비문 등을 비교분석하면 우리의 향촌사회 연구에 일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되었죠.

Q: 참 독특한 이력이십니다. 김교수님 저서가 조선시기 성씨 동향을 중심으로 향촌사회사를 연구한 효시로 학계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방청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주 거론되는 소위 키워드인 토성과 내성에 대한 설명부터 해주시죠.

R: 예, 앞서 설명했듯이, 토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각 군현의 토착성씨로 예컨대 보령현은 보령을 남포현은 남포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합니다. 내성은 이들 군현에 입향한 타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Q: 방금 설명하신 토성은 군현의 토호세력으로 조선시기 그 역할이 컸습니다. 남포현은 남포백씨가 현재까지 보령에 세거해오고 있어 다양한 활동을 살필 수 있다고 생각지만, 보령현의 경우 어느 시기까지 토성의 존재가 확인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R: 예, 보령현 토성의 보령현 세거사실은 조선전기 족보나 묘비의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 청라 황룡리에 있는 양천최씨 최종호 묘비에 그의 배위가 보령최씨로 기록되어 있고, 창녕성씨족보에 성여기 초배가 보령최씨로 세거지와 묘산이 청소 장곡리 일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종호는 1513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병마절도사를 지낸 인물입니다. 성여기의 선대의 세거지와 묘산은 인천인데 성여기부터 보령현 세거와 묘산이 확인됩니다.

Q: 현재 보령지역에 남포백씨 이외의 토성은 모두 소멸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토성 소멸의 원인은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보는지요?

R: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토성이 어느 시기에 어떤 연유로 소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보령현의 정혁신의 예에서 실마리를 유추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혁신은 18세기 보령현 호서유학을 발전시킨 인물로 1845년에 외손인 김박연이 지은 그의 <행장>이 있는데 정혁신의 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이 행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장>에 따르면 정혁신은 보령현 도량리 태어나 46세에 오서산에서 양성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정혁신은 남당 한원진의 사숙문인으로 남포현의 이예환, 백사형이 그의 제자들입니다. 어떻게 사족인 정혁신 가계가 보령현 읍치에 세거하였고 그가 남당 한원진의 사숙문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결성현이 보령현의 바로 이웃현이고 그의 학문을 흠모하면서도 평생 사숙문인으로 지냈다는 것이 당시 학문의 풍토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Q: 그렇군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로 계속하여 이어지질 기대해 봅니다. 그럼 내성으로 넘어가 볼까요? 김교수의 책을 통하여 조선시기 성씨의 구체적인 입향사유가 학술적으로 밝혀졌다고 봅니다. 아마도 성씨의 입향을 한국시대사적 측면에서 통시적으로 면밀하게 살펴본 사례분석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보령현과 남포현 입향성씨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R: 무엇보다도 보령현의 특징은 본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55개 성씨 중 40개, 그러니까 약 72%의 성씨가 광산김씨 내외손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많은 성씨가 단일현에 입향한 사례는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사족연구에서는 안동 하회마을 풍산류씨 집성촌을 대표적인 사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계는 현재의 안동하회마을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풍산류씨의 경제력을 꼽습니다. 이곳이 류성룡의 사패지였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많은 성씨의 보령현 입향이 가능했을까요? 이 또한 광산김씨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산김씨입향조인 김성우가 왜구 토벌의 공으로 보령땅을 사패로 받았다는 <동국여지지>나 <여지도서>의 기록은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많은 성씨의 보령현 입향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들 지리지는 김성우의 행적과 보령현 입향 고증에서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예, 이처럼 많은 성씨가 보령현으로 입향할 수 있었던 것은 하회마을의 류성룡의 사례에서 지적했듯이 광산김씨의 경제력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저도 예전에 청라동의 광산김씨 세거지와 묘산을 둘러보며 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럼 남포현은 어떤가요? 남포현은 임란 이전에 입향한 재지사족과 이후에 입향한 신사족의 세거지와 묘산, 통혼권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대립의 기저에 혹시 당색같은 것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요?

R: 예, 제 생각으로는 이러한 대립의 바탕에 당색보다는 정치성향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임란 전까지 남포현에 입향한 성씨 대부분이 계유정란이나 기묘사화와 같은 정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경주김, 통천김, 순천김씨 등의 입향이 계유정란과 연관이 있습니다. 순천김씨의 선대인 김종서가 계유정란으로 희생된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나 임란 이후 남포현으로 입향하여 조선후기 남포현을 대표하는 안황윤최씨의 경우 계유정란에 공을 세운 공신의 후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성향의 차이가 세거지와 묘산, 혼연에서도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Q: 그럼 마지막으로 내성의 특별한 입향 사례는 없는지요?

R: 예, 특별하기보다는 보고되는 사례로 관직과 복장에 의한 입향이 있습니다. 보령현감을 지낸 정신남과 남포현감을 지낸 남옥 그리고 장수황씨를 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기 본관지를 떠나는 것은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경주정씨인 정신남은 5년간 보령현감으로 재직하였는데 그의 사후 보령현에 묻혔고, 두 아들이 사마시에 입격하는데 거주지가 보령입니다. 남옥은 남포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부친의 묘소를 남포현 관당리에 썼고 그의 사후 묘지를 이곳에 만들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된 배경이지요. 또한 장수황씨는 황즙이 임란 때 처가인 비인현으로 피란 내려와 입향하였으나, 그의 사후 아들 황정직이 남포현에 묘소를 마련하면서 남포현에 세거하게 된 배경입니다.

Q: 예, 그렇군요. 그럼 사족의 재지활동으로 넘어가 볼까요? 조선시기 사족의 재지활동에서 눈에 띄는 것이 선대의 추숭활동, 향교, 서원, 읍지간행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해보기로 하죠. 먼저 족보에 대해 살펴보면 광산김씨족보함이 1589년에 석함으로 만들어져 전해오고 있어 그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아마 묘지 상석을 족보함으로 만든 사례는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타 성씨의 족보는 어떻던가요?

R: 예, 광산김씨가 보령현에 가장 먼저 입향하기도 했지만 추숭활동 또한 선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산김씨는 16세기 조선사회의 시류에 걸맞게 족보를 만들었고 1589년에 족보함까지 건립하여 족보를 보관해왔던 겁니다. 그러나 족보함에 보관되어오던 족보를 도난당한 것이 아쉽군요. 잘 알다시피 족보는 조선시기 사족이라면 반드시 입보되어야만 군역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각 가문에서 앞 다투어 족보를 만들려고 애썼고 이러한 사실은 본 책의 집필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족보가 근대에 간행된 대동보라는 한계가 있었고, 더욱이 선계에 대한 기록이 매우 영세하거나 계보가 단선으로 이어지고 있어 성씨의 입향을 고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산김씨족보함을 비롯한 족보첩, 묘산도는 향촌사회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대부분은 입향조 묘비나 신도비 등이 최근에 건립된 또 다른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Q: 선대의 추숭활동 중에서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R: 예, 조선전기까지 보령현 향촌사회를 지배한 것은 광산김씨였고 조선후기엔 처향으로 입향한 한산이씨가 주도했습니다. 반면에 남포현은 지배사족이 없던 양립된 사회였죠. 향교의 청금록, 서원건립, 읍지 등은 당시의 두 현의 향촌사회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특히 향교 청금록에 수록된 도유사, 전교의 수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Q: 그런데 보령현과는 달리 남포현의 청금록은 근대에 작성된 것으로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R: 예, 저 또한 남포현의 경우 청금록이 근대의 자료라서 결론을 내리는 데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포현 사족의 향교 이외의 재지활동으로 미루어볼 때 향교가 임란 이전에 입향한 성씨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Q: 예 알겠습니다. 보령현의 화암서원의 경우 벽촌임에도 불구하고 창건 및 사액과정에서 당색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었나요?

R: 예, 그동안 화암서원에 관한 글이 종종 발표되어왔으나 당색의 문제를 제기한 논저는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화암서원을 둘러싼 제 문제를 밝혀내게 되어 보람 있습니다. 화암서원의 창건 및 사액과정은 색이 다르면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삼불통이라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Q: 아! 그렇군요! 김교수가 마침내 그동안 화암서원을 둘러싼 제반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은 것이군요. 그런데 남포현의 신안사는 좀 다르지 않은가요? 저 또한 백이정의 고향인 남포현에 백이정 향사를 위한 사당이 18세기 말에 외지인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시기 성리학의 사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요.

R: 예, 맞습니다. 이러한 부조리는 이미 설명했듯이 신구사족의 대립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포현의 풍천임씨와 경주이씨가 임자순, 이제현의 후손들이고 이들이 백이정의 제자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더더욱 납득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하지만 조선시기 향촌사회의 지배가 사마시로 결정되는 당시의 사회구조로 볼 때 남포현의 사마시 합격자 대부분이 임란 이후 입향한 신사족이라는 사실에서 이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일부 글에서 백이정의 사우가 건립되지 못한 이유를 남포현 사족의 세력이 미약하여 중앙세력과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선후기 입향성씨 면면을 볼 때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봅니다. 이러한 남포현 사족의 양립은 신안사가 2차 훼철 이후 재건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구한말에 윤석봉에 의해 집성당이 창건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 이유라고 봅니다.

Q: 마지막으로 18세기 당시 보령현 사회문화를 집대성한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보령현 읍지인 <증보신안지>에 대해 말해보지요. 무엇보다도 이 읍지의 감수자인 보령현감 정권이 편집과 교정을 분리하여 당색에 균형을 맞춰 편간한 객관성이 보장된 읍지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김교수께서는 이런 <증보신안지>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기쁘시겠습니다.

R: 예, 물론 기쁘기도 하지만 보령현과는 달리 남포현에는 이런 읍지가 없다는 것이 본 책의 집필에서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보령현 읍지 필사본이 전해져 오고 또한 하버드 대학 엔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보령현읍지가 전문가의 해제도 없이 번역출간된 것은 참으로 아쉽죠. 류교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한 번 손댄 작품을 다시 손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조선시기 충청우도 향촌사회사>의 저자인 김영모 교수와 이 책에 관해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면서 느낀 점은 이 책이 향후 우리나라 조선시기 전국 군현의 향토사회사 집필의 한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역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여기 참석하신 여러분들께서도 앞으로 이 책의 강독을 통하여 조선시기 향촌사회의 이해를 도모하여 앞으로 보령시가 나아갈 방향에 조타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대담을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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