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배고픈 상태로 독서실에 왔더니 친구가 집에서 육개장을 먹고 왔다고 자랑을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고 배고픈 상태에서 들었으니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공부하는 내내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2시에 엄마가 데리러 오셨는데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리니까 엄마가 “할머니가 육개장 끓여다주셨어. 내일 아침에 먹어.” 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기쁘던지. 바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만 육개장 먹냐? 나도 할머니가 끓여주셨거든!”
그 날은 아침에 먹을 육개장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빠 사업 사정 상 할머니와 함께 살진 못하지만 할머니 댁이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이기 때문에 엄마가 손질하기 어려운 것들은 할머니 댁으로 가져가서 같이 손질하기도하고, 별난 반찬이나 찌개를 하면 엄마는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나는 뒷전이고 따뜻할 때 가져다 드려야 한다며 할머니 댁부터 가신다.

내가 2학년 때까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9시가 되면 엄마 이불 속이 아닌 할머니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서 잠들었다. 친구네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어두워지면 자전거를 타고 날 데리러 오시는 분은 할아버지였고, 엄마가 바쁠 때 생선 가시를 발라 숟가락에 올려주시는 분은 할머니셨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유치원 때는 할머니 때문에 옥동자라고 놀림을 받던 시기가 있었다. 할머니가 머리를 잘라주신다며 직접 가위를 드셨는데 양쪽 길이가 맞지 않으니까 계속 자르신거다.

계획은 어깨였지만 어깨는 무슨, 귀 위에 내 머리카락을 보면서 하루 종일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 때가 한창 옥동자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맨날 유치원에서 옥동자라고 놀림을 받고 오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엄마는 시내에 있는 미용실로 날 데려가셨다.

미용실에서도 이 머리는 어찌할 수 없다고 했으니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치원 때의 일기장을 보면 그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할머니가 밉다느니 밖에 나가기 싫다느니 하는 불평불만을 늘어놓고도 주제 칸에 ‘할머니’ 글자를 쓰면서 옆에 하트를 붙였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도 밤에 할머니 옆에 누워 잠든 나를 보면서 엄마가 쓰신 글이 있는데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할머니도 많이 미안하셨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을 담뿍 먹고 자란 나는, 1학년 때 학교에서 나눠준 단팥빵을 친구들이 그 자리에서 다 먹는데도 왠지 할머니께 드려야 될 것 같아 가방에 넣었던 적이 있다. 그날 집에 와서 빵을 꺼내는데 얼마나 먹고 싶던지 그 때의 상황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할머니께 그 빵을 내밀었을 때, 할머니께서는 작은 빵을 반으로 나누시더니 좀 더 큰 쪽을 나에게 주셨다. 할머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 4월에 우리 가족은 시내에 살게 되었는데 그 해 11월 달에 할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6명이 살던 큰 집에 할머니 홀로 남겨지시는 게 안타까웠는지 부모님에겐 무뚝뚝하던 아빠가 그때는 두어 달 동안이나 할머니 댁에 들어가 사셨다.

분가를 했을 때부터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 가족은 분주했다. 빨리 교회에 가서 할머니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점심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점심은 할머니 댁에서 먹는다. 그 시간이 할머니께는 가장 좋은 시간일 것이다.

요즘 우리 할머니는 3학년이 되어 책상 앞에만 있느라 살이 쪄가는 내게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맛있게 먹고 있는 도중에 “조금만 먹고, 밥을 먹더라도 젓가락으로 먹어라.” 하신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다. 분명히 밥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된다고 유치원 때부터 배운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새면서 먹으라니 밥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매주마다 할머니는 “아이고, 좀 빠진 것 같다!” “키도 큰 것 같다!” 이러시면서 다리를 주물러 주신다.

괜히 할머니를 원망했던 마음이 죄송스럽다. 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결국은 나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매주 일요일 할머니 댁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할머니께 “안녕히 계세요.”가 아닌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우리 차가 멀어질 때까지 마당에서 손을 흔들고 계신 할머니가 외로워 보인다. 그때마다 마음이 조금 무겁다고 엄마가 말씀하신다. 가게를 하는 부모님 사정상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늘 마음속에는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내기 때문에 헤어질 때의 인사가 “다녀오겠습니다”이다. 당연히 할머니 댁에 들어가면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오늘도 할머니가 끓여주신 육개장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 잘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든든한 빽이고 영원한 보호자이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한내여자중학교 3학년 송혜령